이제 우리

 

     졸업 후 40년, 나이는 (턱걸이하여) 60세. 환갑 잔치를 가불(?)한 이도 있다고 들었다.


   어찌 회한이 없으랴.  하고 싶은 일 하지 못했고, 해야 할 일 하지 않았고, 피하고 싶었으나 면치 못한 적 자주 있었다.  기특 반, 한심 반으로 바라보는 자식들은 아직도 어린 것 같고.
   기쁨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살아있음 자체가 좋지 않은가?  삶을 선물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기분 좋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날 것이다.  개로 잡고, 윷으로 가서, 업은 후에, 걸?  또 잡고...  응, 두 모라... 어떻게 쓴다?  뭐 그런 식으로.  질 때도 있지만, 애석하기에 다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고.

 

   인생은 <내게 일어난 일(what had happened to me)>과 <내가 행한 일(what I have done)>로 이루어졌다.  그것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에, 어디까지가 내가 능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며 다른 것들이 내가 수동적으로 겪은 것인지 엄밀하게 구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의 상당수는 다른 이들에게도 동시 혹은 다른 때에 일어났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것들이다.  좋은 일이거나 궂은 일이라도.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주위(혹은 환경)>으로 이루어졌다.  나 자신이란 실은 미미할 뿐이고 나라는 총체의 압도적 다수는 환경이다.  사람의 잘남도 환경이 구성한 것이니 잘났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못남도 제 잘못은 아니니 “못생겨서 죄송합니다”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힘써 이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누구라도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
 
   우리는 만나면 이야기를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할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죽었다 싶은 것들, 움직이지 않는 것들, 거기에 그냥 그렇게 있는 것들에게도 이야기가 있다.  세계란 이야기의 총체이다.  그리고, 영어로 -logy로 끝나는 것을 <학>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예컨대 biology하면 생물학, geology하면 지질학인 줄 아는데, 그 -logy라는 게 실은 <이야기>이다.  biology가 살아 있는 것들의 얘기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계속해서 얘기를 만들어가니까, biology는 끝없는 얘기이다.  geology란 땅덩어리 이야기이다.  땅이 좀 오래 됐겠는가?  그러니까 geology도 붙잡으면 쉬 끝나지 않을 얘기라고.  theology는 하나님 얘기고.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인데 얼마나 얘깃거리가 많겠는가?  그러니까 그 신학이라는 게 끝도 안 날 얘기이다.  그렇게 세상이란 온통 이야기 거리이다.

   우리는 만나면 지나간 날들을 얘기한다.  우바보, 고릴라, 다람쥐, 등을 말할 때에 누구나 알아듣는 것은 우리가 이야기 거리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만한 이야기들을 함께 기억하고 나누는 무리를 <전승(傳承, tradition)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다.


   같은 학교를 나왔고, 같은 시대를 살아왔기에 공유하는 기억이 있다고 그랬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살지 않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각자 사적인 기억을 간수한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비밀이랄 수도 있겠고, 다른 것들은 알려져도 상관없거나 차라리 밝히고 싶은 것들이다.  꽃밭 같고 꿈결 같은 황홀한 기억이 있는가 하면, 악몽이랄까 지울 수만 있다면 없는 것으로 돌리고 싶은 진저리나는 기억도 있다. 
   나는 직업상 불행을 현재 시제로 경험하는 이들에게 말을 건넬 기회를 자주 가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의 명예를 옹호하기 위해서 <우리>가 당한 아픔의 정도와 크기는 축소하고 의미는 과장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통이나 불행은 실재하기 때문에 감추거나 없는 것처럼 여길 수 없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때에는 말하지 않았다.  초상집에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말을 했다고 유가족의 슬픔이 줄어들겠는가?  그러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불가에서 그러듯이 사고(四苦), 팔고, 혹은 그 가지 수를 엄청 불려 말하든지 간에, 중생은 대개 비슷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사람마다 같은 경험을 하나 처리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그렇기에 칠전팔기니 전화위복이니 하는 말도 생겼을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사람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춘하추동이 반복되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무에게 나이테와 이런저런 지나온 흔적이 남듯이, 사람도 숨길 수 없는 삶의 자취를 남긴다.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일부러 흉터를 만들 것도 없고, 있다고 내보여 자랑할 것도 없고, 억지로 지우려 할 것도 없고, 감추려 할 것도 없다.  남의 흉터의 내력을 캐거나 힐끔거리며 흉볼 것도 없다.  제 흉터 때문에 겸손해지고, 남의 흉터에 대해서는 위로와 경의로 대하면 되겠다.  바로 그런 보기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을 공유하기에 전우애 비슷한 우정을 지니게 되는 게 아닌지?  그리고, 감사하게 되고.  나는 어렸을 때에 부르던 찬송가 자락 한 개를 아직도 잡고 있다.  “흠이 많고 약한 우리도 용납하여 주시고.”  


   처음에 그러지 않았던가?  “삶은 선물”이라고.  선물은 선택하는 게 아니고 그냥 받는 것이다.  받고 감사하면 된다.  운명?  그것은 <되도록 되어진 것>이 아니라 <놓여진 것>이다.  무를 수 없는 일, 받아들이면 된다.  소설에서 말하는 운명적 사랑이란 없고, 운명을 사랑하면 되는데, 그것은 제 삶을 받아들여 즐기는 것이다.
   아, 살아남기에 급급하다면 어찌 즐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돌아보니, 사람은 살게 되어있더라고.  그러니, 고생할 때조차 품위 있게 고생하는 게 좋더라고.  <생존>의 차원은 벗어나야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문화>의 차원에 돌입하게 되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지 않았던가?  이제 나이 이쯤 되어 더욱 <아득바득>으로는 되는 게 없다는 것쯤 확실해졌을 것이고.


   가난한 이들의 특징은 (비록 적더라도)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카지노에 가서 별 재미보지 못한 사람은 남은 것을 붙잡고 있기가 치사해서 빨리 손 털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다 잃고 나면, “그것이라도 건질 걸...” 하게 되지 않던가?  그러던 걸, “구구팔팔!”이라고.  그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풀풀한 걸.  한 판 단단하게 붙을 만 한데.  그렇지만, 이건 기억하자.  왕년에 우리는 무모한 호기심의 발로로 아슬아슬해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남은 시간에는 작은 실수가 치명적이 될 것이다.  전후반 90분이 지난 후에 허용한 몇 분 사이에 어처구니없는 한 골 먹고 나면 만회할 수 없잖아?  해서 얘긴데, 올인하지 마.


   말도 안 되는 확률에 다 없애버리지 말자


   히든 카드는 기다릴 것 없고
   이미 되어 있지 않으면 지금 꺾자


   운이란?
   비용이다
   기대할수록
   더 치러야 하는 것
   운이 차지하는 몫을 최소화하는 것이
   구조 조정
   경영 합리화


   올인?  하지마
   당신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