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사랑하기

    “농사는 말로 짓는가”라는 아내의 핀잔 때문에 지난주에 쟁기를 손에 들었습니다.  내친 김에 잔디도 깎고 잡초도 뽑았습니다. 
   아, 그 잡초, 뽑고 등 돌리면 또 잡초, 다음날 김맨 곳에 가보면 손대지 않은 데처럼 또 솟아있고 해서 무진 잡초(無盡 雜草)라고 하지요.  마치 살아있는 동안 꺼지지 않는 욕망과 번뇌처럼 잡초는 끝없이 잘도 생겨납니다.


   잡초 중엔 제법 그럴 듯한 꽃을 다는 것들이 있습니다. 잘 몰라서 그렇지, 나물 감이나 약재로 쓰일 만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선입견을 버리고 대하면, 대접받을 만한 것들이 있다는 얘기죠. 
   “버젓한 이름이 있는데 제 이름 놔두고 잡풀로 부르다니?  혼합 교배하여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순수혈통을 지키고, 막 되먹지도 않았는데, 잡(雜)이 뭐냐?”라는 항의에 대하여 땅의 임자는 할 말이 있습니다.  “너는 내가 심지 않은 것이야.  내 밭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었어.”
   가치 없는 것, 농작물에게 돌아갈 양분을 빼앗는 해로운 것이라는 기준이 분단을 고착하지는 않아서, 나중에 특정 잡초의 효능이 알려져서 재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그 밭에 심었던 작물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있다가 싹이 트면 ‘잡초’가 되고 맙니다.


   옥토를 넘보며 자리를 트는 염치없는 잡초가 있는가 하면, 워낙 척박한 땅이라 그런 류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자랄 수 없는, 말하자면, 진공을 싫어하는 자연의 빈곳을 채워주는 잡초도 있습니다.  “나니까 이런 곳을 찾아와서 풀빛을 엎지르지.”라고 생색내지도 않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치열(熾熱)하게 수고합니다.


   잔디밭을 침범하는 잡초 중에 알려진 이름은 ‘민들레’입니다.  그것은 얼른 눈에 띠기 때문에 잠입이 쉽지 않고, 주인(정원사)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뽑히게 됩니다.  풀잎이 칼처럼 생긴 것들, 그러니까 잔디를 닮은 것들은 ‘비슷한데 아닌’ 가증스러움 때문에 괘씸죄로 가중 처벌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형량의 경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되나 못되나 죽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그것들은 뛰어난 위장술 때문에 초기진압, 예비검속의 탄압을 모면할 수 있겠으나, 종국에 ‘가라지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만 두어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리라”(마 13:24-30).


   다시 민들레로. 지긋지긋하게 영토권 분쟁을 야기하는 민들레는 샛노란 꽃의 천연덕스러운 미소 때문인가, 깃털 달린 홀씨의 황홀한 비상(飛翔) 때문일까, 혐오감을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동정은 금물인데.
   왜 잔디밭에 민들레가 창궐할까?  주인 잘못입니다.  가꾸지 않아 토양이 부족한 땅에서는 잔디 같은 귀골(?)은 견디지 못하고 비실비실 하게 되는데, 그러면 ‘틈새공략’에 탁월한 민들레가 “그럼 실례...”로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민들레를 제압하는 길은 제초제를 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때맞추어 시비(施肥)하여 지력을 돋구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라고요?  그러면, 민들레 ‘처리’에 고심하는 이들에게 고수의 비방을 알려드리지요.
     
      어떤 사람이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온갖 아름다운 씨를 심었다.
      그런데 얼마 후 정원에는 그가 좋아하는 꽃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들레가 피어났다.
     
      민들레는 뽑아도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또 피어났다.
      민들레를 없애기 위해 모든 방법을 써봤지만
      그는 결국 성공할 수 없었다.
      노란 민들레는 다시 또다시 피어났다.
 
      마침내 그는 정원 가꾸기 협회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내 정원에서 민들레를 없앨 수 있을까요.
      정원 가꾸기 협회에서는 그에게 민들레를 제거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방법들은 그가 다 시도해본 것들이었다.
      그러자 정원 가꾸기 협회에서는
      그에게 마지막 한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세요.’ 
     
    (이상 류시화의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에서)
     
   내 삶의 반경에 침투한 ‘민들레’는 ‘나와바리’를 관리하지 못한 내 잘못 탓입니다.  그렇더라도, 이제 와서 후회할 것도 없고, 웬만하면 민들레를 봐주면서 같이 살게 할 수 없을까.  품어주면 안될까. 
   그리고, 그 ‘잡초’라는 게 그렇지.  존재 이유나 효용 가치는 생태계 전체의 차원에서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러니, 창조주께서 하실 일이지, “너는 잡초다, 가라지다, 백해무익이다, 이단이다.”라고 판단하지 말자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