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이다

실패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이다

   발명왕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에디슨은 째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학력은 ‘국졸’도 아니고 ‘초등학교 3개월 수료’이다.  “저런 저능아는 학교 다녀도 소용없다”라고 단정한 교사가 강제 퇴교시켰다는데, 교사가 대답할 수 없는 엉뚱한 질문을 자주 던져서 홧김에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발명품으로는 축음기, 백열전등, 촬영기, 영사기, 축전지, 등 특허가 있는 것만 1,093개이다.  천재는 뭘 척척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필라멘트가 달린 백열등을 상품으로 내놓는데, 2,000번을 실험했다고 한다.  (9,000번으로 기록된 책도 있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실패가 연속될 때에 기분이 어떠셨나요?”  그의 대답이다.  “나는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요.  완성하는데, 2,000 단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1914년 토마스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전 재산이랄 수 있는 실험기구와 공장 설비,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결과를 모은 자료들이 전소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찰스가 급보를 받고 현장에 도착했는데, 불붙는 장면을 즐기듯 바라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한다.  “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냐?  이런 광경 언제 또 보겠니?  찾아서 어서 모셔오너라.”  그 이튿날, 그의 꿈, 희망, 추억, 업적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것을 본 에디슨의 말이다.  “좁고 불편했는데 잘 됐구나.  그리고 말이다, 파괴란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우리들의 잘못을 지울 수 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던 날, 시몬은 빈 그물을 씻고 있었다.  밤새 노력했으나 헛수고이었다.  만지기도 싫겠지만, “어떡하나, 내일도 날인데, 그리고 안 되는 날도 있는 거니까, 뭐, 그런 거지.”라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연장을 챙기는 중이었다.  그때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라고 분부하셨다.  고기잡이에 대하여 알 것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 말 듣는 것도 싫을 것이고, 한참 언짢은 기분일 테니, 사나운 눈길 한번 던지고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시몬은 복 있는 사람이었다.  하는 말이라니.  “밤새도록 애쓰고도 잡은 게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보지요.”  마는!  그 반전이 묘미이다.  별로 희망 걸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말짱 헛일일 것 같은데, 누가 알아?  요행수를 바라는 게 아니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어보겠습니다.”라는 뜻이다.  믿을 신(信) 자는 사람(人)이 말씀(言)에 기댄 형상 아닌가.  


14년 후에야 개종자를 얻은 선교사

   파키스탄에서 사역하던 어떤 선교사는 그곳에서 14년 동안 단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했다.  본전 생각났겠네.  돈만이 아니고, 공이나 시간을 쏟아 부었는데 별무소득(別無所得)이면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고국에 돌아온다고 별 뾰족한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머물게 됐는데, 그 후 10년 동안 교인들이 생겨서 100여명이 모이는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14년 만에 떠났으면 단 한 명의 열매도 없이 ‘헛수고’였다는 생각만 하면서 여생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사람을 얻는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구나.  전도이던지, 양육이던지.  


몽당연필, 부지깽이 토막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은총이다.  은총무한 은혜무비(恩寵無限 恩惠無比).  가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길 없어라.  실망의 그물을 다시 한번 가능성의 바다에 던져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말씀’이 있으니까.  말씀이 소망이고, 가능성이고, 능력이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갈릴리의 무지렁이 어부는 다시 한번 그물을 던졌고, 훗날 주님을 배반하였으나 다시 쓰임 받았다.    
   캘커타의 성인 테레사 수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몽당연필입니다.  하나님은 이 몽당연필로 좋아하시는 것을 그리십니다.”  몽당연필 자체가 귀한 건 아니지만, 가령 그것을 쥔 게 하나님의 손이라면, 그 몽당연필은 피카소의 붓보다도, 셰익스피어의 펜보다도 더 귀하게 쓰임 받지 않겠는가.  타다 남은 부지깽이 취급한다고 섭섭할 것 있나, “그래요, 저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부지깽이입니다” 하면 되겠네.  워낙 짧아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많은 나무토막 중에 제가 택함을 받아서 황홀했습니다.  이제 아직도 찬 구들장 데우는 데 보탬이 되도록 저도 불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