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쉴 곳 찾았네
LA에 가면 들리는 데가 있어요. 칼라바사스라는 동네에서 해변으로 나오자면 큰산을 넘어야 되는데, 그게 제법 괜찮은 길이에요. 까딱수에 굴러 떨어질 수도 있고, 나이 먹은 4기통 차는 숨차서 못 올라가고, 산적이라도 나옴직한 길이거든요. 토팡카 캐년으로 올라가 멀호랜드 하이웨이로 돌아서 말리부 캐년으로 내려오는 길을 ‘한 주일에 한 번쯤은 달려 봤으면...’하는 마음이데요. 그 동네 산다고 그럴 것도 아니지만.
좀 많이 걸었다 싶을 때에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면 그게 ‘쉼(休)’이에요. 시골 마을에는 정자나무라는 게 있어서 그리로 사람들이 모이지만요, 기왕 쉬자면 나무 밑에 혼자 있는 게 더 좋겠습니다. 깨닫자고 하면 쉬지 못하지만, 쉬다 보면 깨달음도 따를 수 있겠거니. 그래서 석가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았고, 노자에게는 박목(樸木), 장자에게는 산목(散木)이 있었지. 마치 소가 그늘에 앉아 되새김질하듯이 사람도 어느 때가 되면 나무 밑에 앉아 인생의 의미를 반추하는 게 좋겠구먼요. 그것을 힌두교에서 ‘수하기(樹下期)’라 하지요. 간디의 아슈람 운동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 그만 달리세요. 바쁨과 고달픔이라는 피대에 매어 쳇바퀴 돌아갈 듯 살지 마세요. 죽을 연습을 반복하는 게 ‘참삶’이고 살겠다고 발버둥침은 ‘이미 죽음’이랍니다.
나무에 기대어 치켜다 보면, 가지가 하늘을 받들고 있음을 알게 되지요? 인다고 할는지요. 하늘을 이듯 옴진 팔들이 경건해 보이네요. “이와 같을 때엔 손 높이 드네 손 높이 드네 주님(주-임, 주를 머리에 이고 높임)께.” 뿌리가 땅에 내려 기름진 것을 빨아들이듯이 가지는 하늘에 뻗쳐 신령한 것을 따서 담는데, 그렇게 사는 살림이 복된 사람이지요. 몸사람(肉)과 얼사람(靈)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는 거지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자, 제가 잠시 산 나무 밑에서 쉬었는데요, 그건 깜빡 쉼(休息)이고 이젠 아주 쉼(安息)으로 들어가야 되겠어요. 그건 죽은 나무 아래(安)에서 될 일이지요. 종려나무(palm) 그늘에서 쉼으로는 해결이 안되던데요.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종려와 물샘이 있는 엘림보다는 골고다 언덕이 참으로 쉴 곳인 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