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s Moriendi

 Merge
  
요즘 그렇겠는가마는, 옛적에는 졸업식 때에 정말 슬퍼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나는 답사를 읽었다. 

“그 춥고 어두웠던 기나긴 겨울이 지나 삼라만상이 찬미하는 봄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도리 없이 슬퍼지는 것은...” 등, 몇 구절을 기억한다.)  

 

그때 부른 노래.  재학생들이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를 부르면,

2절은 졸업생들의 답송,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로,

그리고 3절은 다같이 부르는데, “냇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로 끝났다.

 

하이웨이를 달리다보면 갈래길이 하나로 되니까 조심하라는 표지판(‘Merge’ sign)이 나온다.

 

Merge: 합병(合倂), 포섭(包攝), 귀일(歸一)

 

“Who need be afraid of merge?”
         -Walt Whitman- 


 

 

Ars Moriendi (1) 

 

우리는 왜 죽는가?
살았으니까.
화낼 것 없다.

사는 게 힘들지 죽는 거야 뭐 그리 어려운가.

잊혀진다는 것, 그게 좀 내키지 않는 게지.
가보지 못해서, 그리고 갔다온 사람이 없어서,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는 게 좀 켕긴다.
알지 못하는 곳이라고 해서 ‘험한 데’는 아닐 터. 
우리가 맞이한 오늘은 어제 다 알지 못했던 것이니까.

 

 

Ars Moriendi (2)

 

이내(以內)는 일정한 범위 안이라는 말이렷다. 

두 점, 혹은 두 선이나 둘레 안인데, 그 범위는 경계까지 포함한다. 

처음과 함께 끝도 포함되고.
탄생이 생애에 포함된다면 죽음도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죽음 때문에 삶을 인지한다.
도화지의 테두리, 그 제한성 때문에 ‘작품’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