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음 1
날이 어두워 아직도 밤인가 했다.
비바람에 천둥번개로 요란한 밤이 지나기 전에 딸과 사위는 떠났다.
두메산골에 살다가 주에서는 가장 크다는(州都) Albuquerque에라도 나와 연휴를 보내려다가
네 시간 드라이브에 “내친걸음인데...” 하며 열두 시간을 더 달려 ‘집’에 온 아이가
사흘 밤 자고서 한국 식품 잔뜩 싣고는 돌아갔다.
웬일로 진눈깨비가 횡으로 몰아치는가, 텍사스에서는 정말 드문 일인데, 하필 이런 날에...
예전에 “산 너머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라는 노래가 있었지.
{나야 뭐 집밖에 나갈 일 없는 사람. “집에 있으면 storm이 좋다”는 말도 있지.}
카드도 보내지 못하고-가만, 다른 이들은 아직 하는가? 내가 받아보지 못하니- 해서
카톡으로 “You're remembered”라는 뜻으로 약식 인사라도 하려는데
{“귀체 미령하시다는 소식 듣고 차도가 다소 있는가 하여 진즉 여쭈고자 하였사오나 소생도...”
그런 투로 말이지}
몇 안 되는 친구들 할배라 그런지 스마트폰을 쓰지 않더라고.
선물 준비하지 못해 장미 한 다발로 때우려는데, 그것도 좋다고 해서 좀 미안하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여러 단계가 있겠지만, 개화부터 낙화까지 짧은 한 챕터
발전적 해체 현상이라고 할까 벙글 때부터 떨어질 때까지의 시듦
하! 내가 지금 그렇다니까.
아무 하는 일 없는데 이 무슨 근거 없는 절정기의 황홀?
평생 그랬듯이 한 해 돌아보더라도 의지와 상관없이,
그러니까 내가 한 일보다는 내게 일어난 일로 만들어진 분량이 훨씬 많고
인연은 짓지 말자고 해도 걸려들고 피해도 부딪히는 것이니까
{그래도 ‘좋은’ 인연으로 선순환 하는 게 낫겠지.}
있었던 일들은 있도록 되어있었거나 그렇게 몰아간 것이지만
될 대로 된 거라면서도 짠한 건 어쩔 수 없네.
대선 결과를 기대했다가 힘이 빠져 명줄을 놓아버린 시위 노동자를 두고 한 말
“힘이 되지 못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처럼
하고 싶어 그런 건 아닌 일에도 당당할 수는 없으니까 무력감과 자괴야 피어오르기 마련.
자폐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가 “그래서 사랑하고 그래도 사랑한다”는 이름의 책을 냈더라고.
‘그래서’가 분명치 않으면서 ‘그래도’를 끌고 나아가는 이들은 고단할 거라.
좋아한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 이제 와서 뜯어볼 것 없다.
남자를 화나게 하는 말들 중에 이런 것, “연애를 좋아하는 거지 상대는 아무라도 상관없는 거죠?”
똑똑? 거기까지다.
선택은 떨리는 일이다.
실패가능성, 무를 수 없어서뿐만 아니고
관계는 본성도 변화시키게 되니까.
‘맺음’은 그런 것.
장미. 꼼꼼히 살필 필요도 없이 흠 없는 장미는 없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꽃이라도 다 예쁘다.
천품(天稟)과 격조의 차이랄까 그런 건 있는데
“에고, 전 천품(賤品)입니다” 밝혔어도 좋아한다는 데야...
고맙다.
“이 나이에...” 그럴 것 없고
사랑하면 사랑한다 말하고
울고 싶으면 울고
그리고, 고맙지 뭐
참 고맙지.
Miserere Mei, Deus (Choir of Westminster Abb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