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滿

 

 

 

  
채워지지 않았으나


   소만은 입하와 망종 사이로 음력 4월의 중기로 양력으로는 5월 하순경이다.  입하 다음 절기이니까 이론적으로는 여름철인데,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나다니다가는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소만 바람에 섬 늙은이 얼어죽는다”는 속담도 있다.
   왜 작은 小 찰 滿을 썼는가 하면, ‘만물이 점차로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뜻인데, 아직 넘칠 때는 아니라 그런 것 같다.  나무들이 갈아입은 새옷 색깔이 속옷으로는 진하고 겉옷이라기에는 옅은 완두콩 빛깔일 때.  나희덕 시인이 ‘소만’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는데, 이렇게 시작한다.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그게 좋은 거네.  헐벗음 지나간지 오래 되었지만 무성(茂盛)에 이르지 않은, 찰 영(盈) 기울 측(仄)의 주기에 따르면 상현과 만월 사이, 음력 열 하루께 쯤으로 잡으면 되겠다.
   그때가 좋은 때이다.  그 때가 언제냐고?  넘치지 않아도 넉넉한 때이다.  모자라는 것 같은데 섭섭하지 않은 때이다.  그때 하는 말이 있다.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그럼 그게 행복 아니겠는가.


자발적인 포기


   고대 희랍인에게는 ‘행복’이 ‘행운’이었다.  좋은 운수(eudaimon), 즉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 많은 몫이 행복을 구성했다.  그건 현대인의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도 않겠다.  그런데, 옛적 희랍인들은 과분한 운수가 신의 분노를 유발하지 않도록, 지나치지 않았다.  넘칠 것 같으면 비우고, 더 자랄 것 같으면 치고 그랬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 “너 자신을 알라”가 실은 “네 분수를 알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면, 그 ‘자발적인 포기’가 가능한 단계는 결국 넘치기 직전이겠는데, 바로 그때를 감지할 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던걸.  갈 때까지 가던 걸.  갈 때까지 가면?  망한다.  터지면 다 새고 만다.  샌 것은 주워 담지 못하고.  그러니까, 아예 좀 부족하다 싶을 때에 만족한 걸로 여겨야 한다.
   그런데, 부족한 건 부족한 것이다.  채우고 싶다.  ‘헛헛증’이라는 게 병이라고 할 수 있겠는지, 먹어도, 먹어도, 차지를 않거든.  먹었다고 기운 차리지도 못하고.  예전에 사마리아 땅 수가 마을의 여자가 그랬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는데, “내겐 남자가 없다”고 그러지 않던가.  그 여자만의 얘기가 아니고 다들 그러지 않던가.  “만족 주지 못한 것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넘친다고 그런 사람들


   넘치면 안 된다는데, “넘친다!”고 그런 사람이 있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그건 채워지지 않는 부분, 채우지 않는 게 좋은 공간, 채우면 안될 영역을 주님께서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사랑은, 진실한 사랑은 그렇게 넘친다.  주님께서 그런 사랑을 부어주셨다.  은혜는, 값없는 은혜는 그렇게 넘친다.  주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푸셨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라고 말한 바울의 형편은 어떠했을까?  그는 수감생활 중 그렇게 말했다.  “우리 늘 기뻐하자, 모든 일에 감사하고.”  최선의 여건에서만 최선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고,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선의 열매가 맺을 수 있다.
   문제는 내 것, 아니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을 좋아하느냐이다.  아직 덜 찬 듯 싶어도, 부족하다 싶어도, 남의 것과 비교하면서 기가 죽는 듯 해도, 아무렴 내 것이 좋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내 조국, 내 교회, 내 아내/내 남편, 그게 좋은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 최고!  당신이 제일!  괜히 두리번거리지 마시오.  예쁜 데라곤 눈썹과  뒤꿈치뿐이더라도 내 아내, “때묻은 행주치마 정성이 어린 이러한 여자래야 여성 넘버원!”  그러면 됐다.  가진 것이 부족해서 조금만 더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보다 이미 받은 것도 넘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대책 없는 아저씨, 참 볼품 없는 분이었는데, 촌티가 팅팅 튀게 ‘행복’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
 
   보통은 공동번역이 더 좋은데, 이건 아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떼어 주신 기름진 땅
    흡족하게 마음에 듭니다.”


   흡족한 번역이 아니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