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읽기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에 가서 공부하면서 키브츠에서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그랬듯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데, 때로는 큰소리로 부르짖는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심으로 “아니 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기도도 하지 않고...”라는 언짢음도 키웠다는 거죠. 한가지 인정할 것은 저들이 성경은 열심히 읽더라나요.
어느 날 논쟁이 벌어졌답니다. 왜 교우들끼리 때로는 서로 비난하잖아요? “저 사람은 교회 나온다면서 믿음도 없어.” “제 딴에는 믿음 좋다면서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 말야.” 그런 얘기들 말이지요. 영적이니 세속적이니, 기복신앙이니 신신학이니 하며 편가르기하고 그러지요? 아까 그 사람 얘긴데, 공동체의 중간 지도자쯤 되는 이가 그러더래.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게 말씀하시는 시간이고, 네가 기도할 때는 네가 하나님께 말하는 시간인데, 어떤 시간이 더 귀하냐? 네 말이 더 중요하냐,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겠냐? 성경을 두 시간 읽고 나서 20분쯤 기도하여라.” 거기에 대해서 별로 대꾸할 말이 없더래요.
일찍이 마이모니데스가 그랬거든요. “너 내일 결혼하느냐? 오늘 말씀을 읽어라. 너 내일 사업을 시작하느냐? 오늘 율법을 공부하여라.”
제가 ‘성경 읽는 게 더 중요하다’, 혹은 ‘기도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거든요. ‘말씀 받고 기도하고!’ 그러면 되요.
그리고, “제발”이라는 말을 붙여서 호소하는데, 형제의 믿음을 업신여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저 제가 바로 서서 순종하면 되지요. 몇십 년 교회 문지방을 어지럽힌 것을 공덕으로 여기지 마세요. 그리고, '세상적'이라는 말 자주 사용하지 마시고. 왜냐하면, '세상적'의 반대어가 '영적'이 아니고 '종교적'이거든요. 저는 그 지독한 '종교' 냄새를 견디지 못해요. 세상적인 사람들처럼. 복음은 생명이지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가 생명을 구박하고 말살하는 경우가 흔하거든요.
이스라엘 사람이 성경을 읽는 방법이랄까, 전통에서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카라(kara)'인데, 크게 소리내어 읽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가(hagah)’인데, 그건 묵상으로 읽는 거예요. 묵상이라고 전혀 소리내지 않는 것은 아니고, 연인끼리 만나면 저희들만 들리도록 속살거리듯이 말씀을 속살거리며 읽는 거예요. 입술로 읽는 소리가 자기 귀에까지 들릴까말까 하는 정도, 춤추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율동이 들어간 듯이 몸 전체로 읽고, 즐거운 마음으로 속살거리며 읽는 거예요. 성경은 나이트 스탠드에 두었다가 잠 안 올 때 펴면 졸리게 되는 수면제가 아니고, 진리와 생명이 그 속에 담겨있으므로 기쁨으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건 딴 얘긴데, 무슨 특정한 문제에 대한 명답을 찾는 식으로, 처방전을 기다리는 태도로 성경을 읽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왜, 말씀을 돌비(石碑)가 아니라 마음 판에 새기라는 말씀도 있었지요? 아가에는 뭐라고 그랬어요?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Place me like a seal over your heart, like a seal on your arm)(8장 6절).” 그게, 왕년에는 “영자 일편단심”과 더불어 큐피드의 화살이 심장을 관통한 문신을 팔뚝에 새기기도 했잖아요? 요즘에야 그 문신이라는 것도 세련되었네, 예쁜 나비 등을 깊은 곳에 찍기도 하지요.
저는 심심상인(心心相印)이라는 말을 즐겨 썼고. 그래, 마음이 마음에 주시는 말씀을 새기면서--좀 아프기도 할거라--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어라”, 그렇게 읽어야 하지 않겠는지.
눈물로 쓴 편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