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동백이 아직 남았냐고 물었다.
“Tons of...”라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갔는데...
“별로...”였다.
괜찮은 애들은 벌써 한물 갔고,
(그야 그렇겠지, 올 된 것, 까진 것들은
금방 가버리잖아?)
만생종이 좀 남았더라.
그 늦깎이들,
“니네들은 내가 보려던 게 아니었어”
할 수 없어서
그 아래 누웠다.
똑, 똑, 똑똑똑...
모가지 꺾어지는 소리 이어지면서
선혈이 쏟아진다.
그게 그러니까, 때맞추어 한국 나갔걸랑요, 매화와 동백을 보겠다고.
이상한파라나 뭐 그런 걸로 개화가 예년보다 석 주 정도 늦어졌다고.
해서 억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가, “거기라면...”하고 LA (La Canada에 있는 Descanso Garden)를 찾아갔는데, 그게 좀... 동백이 장미와 공존한다는 게 그래. 철없는 것들.
아, 이형기 시인이 떠나셨다고? 72세. 그가 ‘낙화’를 썼을 때는 내 나이 반 정도였을 적인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시를 쓰고서 40여 년, 그리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11 년인가 머뭇거리다가 가셨다고 “쩝...”하는 게 아니다. 꽃이 지면 끝인가? 그는 병석에서도 익어갔고, 시집(<절벽>, 1998)도 낳았다.
거기에 이런 것도 실렸다.
이름 한번 불러보자
아아 박재삼!
이왕 갔으니
내 자리도 네 가까이 하나 봐다오
이런 얘기다.
1949년 진주에서 열린 제1회 ‘영남예술제’(후에 ‘개천예술제’로 바뀜) 한글 백일장에서 이형기가 장원을 했다.
17살 동갑내기 박재삼이 시조를 써서 차석이 되었고. 그런 사이.
어찌하랴. 가는 세월 맬 수 없고, 지는 꽃잎 붙여놓을 수 없고.
사랑, 그건 과정일까, 열매일까.
삶은 <도중에 있음(Auf-dem-Wege-Sein)>이지만.
그럼 살펴 가시지요.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