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은 흐른다
전쟁 후에 굴레방다리 근처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지금 추계학원 근처의 굴다리 께에 샘이 있었는데, 꼭 수도관이 터진 것처럼 콸콸 솟았다. 거기서 동네 아낙들이 빨래도 하고 배추도 씻었다. 좀 내려가면 염색공장이 있었는데, 그것이 개천 물 오염의 주범이었다. 하긴 분뇨를 포함하여 온갖 오물이 다 쏟아져 들어왔을 테이니, 먹고살자고 매달린 가내수공업자 하나만 잡아내기도 그렇다.
사정은 다른 데도 마찬가지여서, 그 아현동 바닥을 씻어서 마포강으로 흘러갔을 물뿐만 아니라, 청계천도, 중랑천도, 안감내도, 모래내도 발원지 근처의 맑은 물은 얼마 안 가서 더럽게 되었다. X물이었지 뭐. 그런 것들이 다 한강으로 유입되었다.
한강은? 얼마나 더럽겠는가. 그래도 한강은 웬만하면 푸름을 잃지 않았다. 큰물이기 때문이다. 무슨 자정(自淨)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러움이 어디로 가겠는가 마는, 그냥 희석되는 것이다.
‘깨끗함’이란 자체가 손상되면서 더러움을 포섭하는 ‘힘’이다. ‘워낙 깨끗해서 깨끗함으로 남아야 할 이유가 있고, 그래서 남을 수 있는 것’은 ‘실험실 용’이다.
작은 그릇에 오물이 스며들면? 오염되지. ‘근묵자흑(近墨者黑)’이 그런 이치일 것이다.
캔버스(畵布)란? 오염을 기다리는 순백(純白)이다. 알록달록 섞이고, 덧입혀지고, 개칠하여 ‘작품’이 나오지 않는가. 농담(濃淡) 만으로 처리하는 수묵화라도 그렇다. 침투하는 ‘흑’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백’이 즐거운 낯빛으로 문을 열고 환영하면서 일이 시작된다. 흑은 자신 있지만 방자하지 않은 몸놀림으로 백을 접수한다. 갈김, 떨림, 터짐, 퍼짐의 황홀 속에서도 백은 내어주지 않은 지경(地境)을 간직한다.
‘오늘’이 흘러간다. 섞이지 않으면 좋았을 것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아픔을 시치미 뗄 수는 없지만, 사랑, 감사, 용서를 워낙 넉넉하게 담고 있다면, 물빛이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더러워도 괜찮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을 핑계로 상구보리(上求菩提)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오염원이 되고 말 것이다. ‘거룩’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로 알려진 ‘카도쉬’는 ‘구별’이라는 뜻이다. 떼어냄, 섞이지 않음은 필요하다. 내 마음과 생활 처소에 ‘지성소(至聖所, The Holy of Holies)’는 있어야지. 허물지 못할 곳을 지킴이 지성(至誠, eilikrineia, sinceritas)이다.
숙능탁이정지서청(塾能濁以靜之徐淸, 도덕경 15장).
사진은 1965년 가을에 찍은 소내이다. (관리 소홀로 원본 훼손)
다산의 묘소가 있는 마재(馬峴) 쪽에서 건너편에 있는 고향 분원리를 바라본 것.
강--양수와 팔당 사이--을 건너자면 밭뙈기 만지작거리던 사공에게 "배 좀 건너주~"라고 고함쳐야 한다. 김매다가 힐끔힐끔 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가 챙기다가 건너왔다.
홍수가 몰아다가 쏟아 부은 자갈 사이로 저물면 달맞이꽃이 무더기로 피어났다.
그 후 뛰어 놀던 벌판은 팔당댐으로 수몰되었고, 옛집 근처에는 가든, 모텔 등이 들어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