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묻은 형제의 얼굴을 보면서

흠이 많고 약한 우리도

 

   나는 가수로 데뷔하여 딱 한 번 무대에 섰고, 그 후에는 부르는 데가 없어서 샤워할 때만 소리를 높인다.  1953년 가을, 환도 후에 ‘시민 위안의 밤’이라는 게 열리던 때에 초등학생이 어떻게 불려가게 되었다.  할 줄 아는 건 찬송가 밖에 없어서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를 불렀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휘파람을 불어 ‘집어치워’라는 사인을 보내기도 했지만, 4절까지 끝냈다.  그런데, 3절, “흠이 많고 약한 우리도 용납하여 주시고”를 부를 때에 앞에 앉았던 아저씨가 울기 시작했다.  그때에는 “아, 내 노래 듣고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네.  이 맛에 ‘카수’ 하는가 보다”라는 기분이었지만, 나중에는 “대관절 그 분은 무슨 사연으로...  혹시 처자를 이북에 두고 내려와서 중혼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돌이 많던 성미


   예전에 성미(誠米)라는 게 있었다.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지만,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모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도 하고 넉넉하게 생활비를 지급하지 못하는 교역자에게 “끼니만이라도 걱정 없이”라는 뜻으로 제공하자는 ‘마음’이었겠지.  그런데, 그 성미라는 게 돌이 많이 섞였거나 바구미가 들끓기도 하는 하급 쌀이었다.  요즘 어느 집에서 조리를 보겠는가 마는, 그때는 아무리 조리질을 잘 해도 어금니가 시리도록 “딱!” 소리를 내며 돌을 씹는 일이 흔했다.  밥맛 떨어진 사람이 “웬 밥에 돌이 이리도 많은가, 아무래도 왕모래를 깨소금 뿌리듯 한 것 같아.”라고 불평하면, 아직 당하지 않은 사람이 놀린다.  “그래도 돌보다는 밥알이 더 많지.”  그야 그렇지, 쌀이 더 많다.  문제는 인단보다 작은 돌 한 개라도 밥맛 떨어지고 기분을 잡치기에 충분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모래와 섞인 한 입 몫의 씹던 밥을 뱉지 않았다.  쌀 米자에는 여덟 八자가 두 개 들어가 있는데--그래서 88회 생신을 米壽라고 한다--, 쌀 한 톨 만들어지는데 농부의 손이 88번이나 가야 하기에 그랬다나?  괜히 그냥 뱉어버리면 ‘죄’가 될 것 같고 해서.

 

 

가짜 휘발유는 진짜로 만든다


   그렇다, 낟알이 더 많은 게 사실이지만, 돌 몇 개가 섞이면 하치, 저질 쌀 취급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 가짜 휘발유라는 것 말이다.  아무리 가짜라도 ‘진짜’ 휘발유보다 물 혹은 다른 불순물이 더 많이 들어갈 수는 없을 터.  가짜 휘발유에는 압도적으로 ‘진짜’가 더 많이 들어가 있는데, 양이 얼만가에 상관없이 ‘가짜’가 섞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 ‘가짜’로 분류되는 것이다.
   해서 생각해보는 건데, 내게도 진짜가 많거든.  그것을 괜히 내세우고 싶기도 하다.  “이만큼 갖춘 사람 보기가 쉽지 않을 걸...” 식으로.  그렇지만, ‘극소량’--과연 그럴까!--의 가짜를 떨쳐내지 못했기에 나는 ‘순모’가 아니라 ‘혼방’으로 취급당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높은 순도를 주장하다가는 까딱수에 ‘바리새인’이 되고 만다.

 

 

순종 아닌 것 봐주기


   보통 자기를 두고는 “세상에 어디 완전한 사람 있나?” 혹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형제를 가늠하는 잣대도 같은 것을 써야지.  “사람이 그래서야...”로 깎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나는 ‘짜가’이지만, 그는 명품입니다.”라고 해주자고.  하긴 누구는 명품으로 지으시지 않았겠는가?  흠이 많아 반품되어 그렇지.  그래도, “흠이 많고 약한 죄인도 용납하여 주시는” 분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서로 용납하자는 얘기.
   돌아보니 그렇더라.  순금보다는 합금이 쓸모가 많더라고.  보세시장에서 산 파치를 즐겨 입게 되고.  당초에 귀한 것은 모셔두는 거지 막 쓰기엔 부적당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