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하자니까요

   토니오 크뢰거!  중학교 일 학년 때 만난 친구였습니다.  그를 통해서 받은 명제: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상처받기 쉽다”는 지난 세월에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서 확인되었습니다.

 

   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들이 어떤 이에게는 문제가 되고, 독(毒)으로, 아픔으로 전달됩니다.  그것은 이상(異常)이 아니라 리상(理想)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 그런 거지.”로 넘어가야 할 것을 “사람이 왜 그래야 돼?”로 생각하면 슬퍼지게 됩니다.  그런 슬픔의 까닭을 밝힐 것도 없지만, ‘인간성’의 고귀함을 추구하다보면 ‘인간’을 사랑하기가 어려워진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자가당착의 굴레가 슬픈 거지요.  게다가 ‘인간’의 완벽한 모습에서 많이 먼 사람들--“사람이 그럴 수가 없어.”--에게서 무시--“제까짓 게 뭔데?”--당하는 관계상실이 슬픈 거구요.
  

   ‘동질성’을 ‘가해자의 연대의식’ 정도로 생각하는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에”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한, 영영 사랑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통학길에 먼발치서 다가오는 여학생을 발견하면 땅만 보고 걷게 되어, 물지게를 지고 가는 이와 부딪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소년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 강의실에서 옆자리에 앉는 여학생을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아 그 교정, 마침 봄이라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 목련이 연거푸 피었건만, 꽃들이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편지 한 장 보냈었지.  “아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은 ‘연애’ 이전이었습니다.   “A thing of beauty is joy for ever.” 같은 예술품 감상문(賦)이었달까.  그러고서 몇 날 되었는가, 어쩔 수 없이 여학생들 몇이 모여있는 옆을 지날 때에 들으라는 듯한 모욕-‘히야까시’라고 그랬지요?--과 웃음소리가 가슴을 후비며 쳐들어왔습니다.  아직도 저는 잘 모르는 사이이면서 편지를 보내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고 여겨지는 순수한 마음의 표시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섭섭해진 마을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는지?  거울이 시원찮으면 이미지가 일그러져 보입니다.  왕년에 이발소 거울에 비쳐지던 제 얼굴 모습을 떠올리면서 웃읍시다.  내 얼굴은 저런 괴물이 아니니까 안심하고, 변두리 리발관에서 고가의 거울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는 현실을 이해하자고.

   패거리의 말거리 가운데 박살났던 진실의 파편들이 솜씨 좋은 명장의 작업실에서 원형보다 더 아름답게 빚어지기를 기다리자고.
  사랑?  어려운 일이지만, 아예 안될 거라고 포기하지는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