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올라가진 못했지만
누가 그랬더라, “정상에서 만납시다”라고.
나 보기 힘들겠다. 나는 정상에 올라간 적이 거의 없다.
하기야 정상 좋아하는 다른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니,
“얏호~” 한 번 하고 내려오면 그게 그것 아닌가?
(아니다. 정상의 체험은 있어야 한다. 알면서 괜히 비틀어본 것이다.)
울산에 이틀 머무는 동안 가지산(1,240 m)과 재약산(천황봉이 아니라 사자봉이라고 해야할 듯.)에 다녀왔다.
샤넬 라인의 치마 자락 근처까지 더듬은 정도니까 깊이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고도 900 m 정도까지 차 타고 올라갈 수 있으니까, 높은 곳의 냄새는 맡은 셈이다.
(사진: 표충사)
취서산, 운문산 등으로 이어지는 영남 알프스에 붙어 있는 천성산(812 m)을 보면서 착잡했다. ‘목숨 걸고’ 지키겠다는 여승은 무엇을 지키겠다는 것인지? ‘도롱뇽 지킴이’는 아닐 텐데. 환경보호에 관한 한 불교계에서는 할 말이 없다. 심산의 암자에 이르기까지 포장도로를 깔고 배기량 큰 차를 타고 다니고, 산문의 코앞까지 러브 호텔과 대형음식점들이 들어찬 것은 뭐라고 할 텐가? 석남사, 표충사, 등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절들인데, 광고성 현수막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니 정각 도량의 분위기가 아니다. “이곳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이니 조용히 하시오”라는 패말은 있으나, 대돌 위에 놓인 신발들이 어지럽다. 선방에서 작지 않은 웃음소리도 새어나오고.
도사 같은 목사가 똬리 틀었다 길래 지나는 길에 기도원에 들리려 하였으나 출타중이라 하여 오르지 않았다. 김해 무척산이 큰산은 아닌데(720 m), 산정 호수가 있다고. 백두, 한라와 더불어 그런 데는 세 군데뿐이라고 그러더라만.
물길 백리, 꽃길 백리의 하동을 지나며 구례로 해서 지리산을 들어가야 하는데, 막바지 유세하는 걸음으로 지나쳐야 하니, 가슴이 아리다. 너 결코 잊지 않고 찾으리.
섬진강 가에서 백운산을 바라보며 역시 눈인사만 나눴다.
“내 맘 알지?”
뭘?
“난 고로쇠 마시러 가는 사람이 아냐. 그냥 네가 좋을 뿐이야. 꼭 찾을게.”
아, 그렇게 “꼭...”으로 약속한 적이 많았건만. 금의로 환고향하라시던 어머니께도 그랬고.
순천 근처의 낙안 읍성을 찾아가는 길도 제법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
병풍이 사방으로 둘러친 곳에 옷 갈아입을 만한 자리로 남은 터가 평화로운데, 밥장사들이 극성으로 호객한다.
벌교로 나와서 스무 가지 반찬에 오천 원 하는 백반을 먹고 나니 어두워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강진군 성전면이다.
땅 끝인데 어쩌면 저만한 산들이 앞을 막는가?
강진, 장흥, 영암에 걸쳐 월출산, 천관산, 제암산 등 저마다 뽐내고 있다. 소백산맥이 달려오다가 바다를 만나면서 급정거한 형상이다.
월출산 자락이 마을로 끌려 내려온 곳에 큰 당나무가 있는데, 그 앞에서 무당이 굿을 하던 중에 불청객 침입자를 보고서 눈웃음친다. 어쭈, 여유작작. 아깝도록 예쁘다.
(사진: 굿 장면. 무당이 실실거리니 약발이 먹힐 것 같지 않구먼도.)
다산초당과 동암에서 포구를 내려다봤다.
간척지를 늘려놓는 바람에 다산 때보다는 보이는 바다 면적이 줄어들었겠으나, 그래도 좋다. 완도군의 섬들이 보이고. (오후에 페리로 고금도, 약산도에 들어갔다.)
그런데, 옛날 귀양보내던 곳은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 곳들이었을까? 나 같으면, 쫓겨가면서도 속웃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을 것 같다.
(사진: 백련사 가는 길, 너무 넓혀놓아서 좀...)
대숲으로 잘못 들어와 나가지 못한 바람과 놀면서 800 m 정도의 고갯길을 걸으면 백련사가 된다. 정약용 선생은 출출할 때면 슬슬 움직여 백련사 주지로부터 차(곡차가 아님!) 대접을 받곤 하셨다고. 지금도 식사한 후에 산보하여 차 한 잔 들기에 좋은 거리이다.
(사진: 다산초당, 옛터에 새로 지어서...)
그래, 산보랄까 만보(漫步)랄까, Andante Cantabile로 가면 될 것이다.
물론, 점점 느려져서 멈추고 말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때로는 ‘헐레벌떡’의 Allegro Vivace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자극으로 가슴 뛰게 할 필요도 있겠지만,
산은 뛰어갈 필요가 없는 곳.
그냥 칠부 능선쯤에서 햇볕 쪼이다 내려오면 될 것 같다.
기분 나면 조두남의 ‘산’도 부르고, 김광섭의 시구도 중얼거리고.
(.....)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
떠나기 이틀 전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그쪽 동네 친구들과 오찬을 들었다.
그냥 보내기가 서운한지 종규 형이 관악산에 오르자고 한다. 높지도 않은 산(632 m)에 이미 중턱까지 캠퍼스가 치고 들어왔으니,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한 시간도 안 걸릴 것이다. 응달에 아직 얼음이 있고 왕모래 등으로 미끄러지게 되어, 그저 40분 정도 걸었다. 한교수 말로는 4년 동안 관악산 한번이라도 올라가보는 학생이 열 중 하나도 안될 거라고.
(사진: 소년 시절에 달라이 라마라는 별명을 얻었던 한종규 교수. ‘Der Hirt auf dem Felsen’이 아니라, ‘바위 위의 學童’이다.)
마지막 날, 금촌 야산에 묻히신 어머니께 다녀왔다.
산소 위에 쌓인 솔잎을 긁고 잡목 가지를 좀 베었다. 진달래는 아직 피지 않았다.
그렇게... 그저 그만한 높이라도 올라갔으니,
내려다보며 “Far from the madding crowd...”라는 기분으로 우쭐할 수 있었다.
한 발 내리 디디면, 겸손한 표정으로 다시 어깨를 맞대고 살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