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Freedom...
어제 달라스 동물원에서는 우리를 탈출한 고릴라가 40분간 횡행하다가 출동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자바리(Jabari)라는 이름의 그 고릴라가 멸종위기에 처한 보호종인지 아니면 그냥 ‘보통’ 동물들 중의 하나인지 분명치 않고, 굳이 사살하지 않고 제압할 방법은 없었는가, 그것도 현장상황을 모르는 이들이 할 얘기는 아니다. 다친 사람도 있고, 근접했던 경관이 총을 사용해야 했던 위기감도 인정할 만하다.
그 고릴라에게는 2 에이커라는 전용공간이 제공되었으며 국내 최고수준의 생태환경과 보호철책을 갖추었다니까, 사람들은 그만하면 괜찮고 넉넉한 곳을 굳이 탈출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본래 야생동물의 출몰범위를 2 에이커로 제한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만하면 넉넉하다 싶은’ 안락한 구석(cozy corner)에서 벗어나서 ‘광야’--보호 없는 열린 공간--의 ‘자유’를 경험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유의 짧은 실험은 ‘죽임 당함’으로 끝났다. 일탈(逸脫, deviation)의 대가로는 너무 크지 않은가?
실은 ‘철책 안’이 ‘자유’이었다. 그러나, 자유에도 질적 수준이 여러 단계라서, ‘의식주 보장’이라는 현실로부터 초월과 비상을 추구하는 존재에게 타자가 “그만해도 괜찮은데 감사할 줄 모르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해가 그랬던가? “남들은 자유를 좋아하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라고.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존재, 그러니까,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라는 이들을 “너는 지금 자유하다. 그리고 죽음은 자유의 끝임을 알기 바란다.”라는 말로 설득할 수 있겠는가?
동물원 측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할 것이다. “이만큼 잘해 놓은 데가 없는데...”라는 자긍심의 손상, 고릴라를 다시 구입해야 하는 지출, 입장 수입의 감소, 사건 후에 터지는 줄 비난의 사물놀이 소리, 등. 경황 중에도 열세 살 난 자바리의 숭고한 ‘자유 실험’에 협조하지 못한 사과가 있었으면 한다.
to the vagrant gypsy life
John Masefield가 “I must down to the seas again”을 쓸 때 그는 스물 두 살이었다.
알았을까?
‘바다’는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제한된 자유라는 것을.
해도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어디로 가도 마찬가지.
노련한 항해사는 뱃길로만 가고.
만들면 길이 아니고
길은 발견해야.
‘발견’은 숨겨진 것을 찾아냄이고.
알려진 것은 그대로 따라야.
경험은 사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
제가 다 겪어야 인정하겠다면
그 인생은 엄청난 적자.
그런데...
Columbus는 인도로 가는
‘다른’ 항로를 찾으려고 했고
그것은 착오로 시작해서
실패로 끝났다.
그 실패가 없었다면?
나도 예전엔
귀신 잡았다.
해병이어서가 아니고
도사 이전
그러니까 전도사 시절에
선무당이었거든.
그때는 성공하려다
실패했고
그래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