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은 가고 없어도
낙산사가 탔다는데...
무슨 보국 훈장 같은 것도 아니고 보관할 이유도 없지만, 나는 고 김활란 총장으로부터 감사장인지 표창장인지를 받은 일이 있다. 그까짓 종잇장 하나라도 받게 된 이유는 이대 뒷산에 난 들불을 진화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당시 북아현동에 살던 나는 골목대장으로 조무래기들을 데리고 오정포, 애기능(지금 추계학원 자리), 복준물(福水泉), 새절(奉元寺), 이대/연대 뒷산, 등을 누비고 다녔다. 멀리는 만리현(균명고 있는 동네), 춘향이 고개, 효창공원, 와우산, 노고산 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1958년 봄날 '나와바리' 순찰 중에 근처 언덕에서 연기가 치솟으며 날름날름 불이 번져나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출동! 망설일 틈도 없이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본관이 지휘관의 위치에 있었음.) 평소에 철조망 밑으로 포복하던지 타넘던지 하여 들어갔다가 걸리면 맞거나 벌쓰는 등 혼나기 일수여서 잘 안 하는 짓이었지만, 다급한 상황이라 신속히 침투하였다. 이미 많이 번져서 기세가 흉흉하고 몹시 뜨거웠지만, 목숨 내걸고 진화 작업에 나섰다. 그게 작대기로 휘젓는 정도였으니 불씨 퍼트리기에 일조한 셈이지만, 그래도 용감한 나의 부하들은 윗도리를 벗어서 덮기도 하고 그랬다. 나중에 어른들이 개입하여 완전 진화에 성공했다. “니네들이 장난치다가 그랬지?”라는 억울한 추궁이 없지 않았으나, “우리가 불질렀다면 진즉 도망갔게? 건져내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옛말이 틀림없구나.”등의 어필이 받아들여졌다.
시시한 얘기지만, 낙산사가 탔다기에... 초기에 잡았어야지. 골프 치지 말고, 험험.
그러다 보니 옛날 살던 동네 이름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한때 가자울(남가좌동)에서 살면서 모래내를 건너 철로를 따라 걷다가 굴(연세대 직전)을 지나기도 하고, 대현동 고개를 넘어 아현동에 있는 북성국민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4 km 정도의 통학 거리. 아침에는 개구리를 겨냥하여 사격(팔매질) 연습을 하고 저녁에는 메뚜기를 잡거나 산딸기를 따면서 다니는 걸음이었지만, 지각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전교어린이회 회장이 아니었는가.
토요일에는 당인리 발전소 근처에 있는 송장내로 가서 고기를 잡기도 했다. ‘물 반 고기 반’은 아무래도 과장이겠으나, 실뱀장어를 손으로 잡을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 고기를 잡지 못한 어느 날 대신 뱀을 잡아 들고 갔는데, 아버님께서 격분하셨다. "네가 땅꾼이야?"라고. (그 때 나는 칭찬받을 줄 알았다. 인간을 타락시킨 뱀을 잡았는데...)
나중에는 더 나가서 수색에 살기도 했다. 그냥 ‘수색’ 하면 “뭐 별로...”이겠지만, ‘水色(물빛)’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다를 것이다. 그 동네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주거환경이 아주 다르겠는데, 나는 저탄장을 지나 국방연구원으로 가는 길 따라 조금 걸으면 있던 철도 관사(일제시)에서 살았다. 근처에 아카시아가 많았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샛강이 나오고, 물 빠졌을 때 건너가면 난지도(蘭芝島)이었다. 나중에 쓰레기 매립 장이 되었지만, 그때는 뻘에서 조개를 캐기도 하고, 땅콩 서리를 하기도 했다. (걸리면, Boys' Town 애들에게 죽었다.)
에이, 그 동해안 산불 연기가 여기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군불 냄새 같은 것을 맡고는 실없는 소리가 길어졌다. 최근 일들은 잊어버리고 옛날 옛적 간날 갓적 일들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런 식으로 퇴행이 진행되는 것 보니 “아아 가을은 깊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