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별곡
청산에 살리라
지난 가을 뒤뜰에 나비들이 지천으로 깔렸더랬다.
겨울나러 멕시코로 내려가던 애들이 숨을 고르느라 멈칫거리는 것.
“원한다면 있거라, 올 봄에 애벌레들이 남새밭 싹들을 모조리 갉아먹더라도.”
그렇게 일러주었건만, 다 떠났다보다. 하긴 이곳에서 겨울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물면 나비가 아니게? 나도 너 따라 갈 걸.
나뷔야 청산에 가쟈 범나뷔 너도 가쟈
가다가 져므러든 곳듸 드러 자고 가쟈
곳에셔 푸대접하거든 닙헤셔나 자고 가쟈
떠돌자는 게 아니고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자는 것.
그러자면 떠나야 하는데,
나는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지루함이 동반되지 않으면 기다림도 괜찮고,
그리움 있으면 외로움도 참을 수 있건만.
한 군데 오래 있었는가,
등 보는 일이 잦아졌다.
깨끔발로 다가오는가,
내가 뛰어 나가야 하나.
그 나비들은 아닌데,
봄이라고 돌아다니는 놈들이 있다.
청산(1)
국어 시간에 청산별곡을 처음 대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살어리 살어리 랏다 청산에 살어리 랏다
멀위랑 다루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랏다
그 후라도 그랬다. ‘청산’이라는 말이 일단 떠오르면... ‘푸른 산’이라고 하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혜산 박두진 시인이 교회에 나오시던 때에 그분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시 ‘청산도’를 읊었다.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애교로 분칠한 음성은 아니고, 이끼 덮개를 뚫고 솟은 물이 잔돌을 굴리는 소리로 낭송하였건만, 별로 좋다는 표정도 없으셨다.
청산은 거기 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
물론 들여다보면 생멸변화가 있지만, 늘 푸른 게 아니고,
그 잠시 푸름조차 살아있는 것들이 만드는 것이지만,
그래도 물과 견주면서 산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알았다.
하여 Jeannie는 그렇게 노래했다.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난 님의 情이
綠水 흘러간들 靑山이야 變할손가.
綠水도 靑山을 못 니져 우러 예어 가난고
누군들 거기서 살고 싶은 맘 없을까.
다른 이들도 주절주절...
靑山도 절로 절로 綠水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김인후)
靑山은 엇디하야 萬古에 프르르며
流水난 엇디하야 晝夜에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티디 말아 萬古常靑하리라.
(이황)
말 업슨 靑山이요 態 업슨 流水로다
갑 업슨 淸風이요 님자 업슨 明月이라
이 중에 일 업슨 내 몸이 分別 업시 늙으리라.
(성혼)
(장욱진: 풍경)
청산(2), 그리고 박재삼
오늘 ‘청산’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또 어지럼증.
지금 병중인, 아니 백만 인의 기도 가운데 승리를 예감케 하는 교수/문인께서
박재삼의 시집 ‘다시 그리움으로’를 부쳐 주셨다.
(황송함만 간직하지, 답장하지 못했다. 팬 레터 같을까봐...)
딱 펴니 떠억 고놈이 나타났다. 청산.
아득한 靑山을 보며
죽도록 부지런히 쓴다만
詩를 쓰는 것은
돈과는 거리가 멀고
그러면서 그 짧은 행간에
짜릿한 共感을 심는 일은
늘 아득하기만 하네
그러나 靑山은
아무 일도 안하고
늘 그 자리에 놓여 있건만
햇빛 하나는 잘 받아
그 이마가 빛나는
이 사실이 부럽네
그 앞쪽에 실린...
먼 靑山을 깔고
전에는 뒷산에도
자주 올라갔지만
이제는 다리가 아파
그러지를 못하고
靑靑한 背景만 깔고
그저 바라볼 뿐이네
청산은 가야 좋지만,
(아파서 못 가다니... 뭐 이젠 거기 사시겠네.)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그만해도 괜찮은 것.
술 좀 작작 마시지, 왜 그리 빨리 가셨어? “술이 과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충고하면, “건강만 좋은 게 아니고 술도 좋은 것입니다.”라고 그랬다고. 산다는 건 다 제 선택이니까. 자유당 시절(戰後) 身言書判이 아니라 痛飮이 예술가의 대열에 끼워주는 조건이 될 때에, 그도 어지간히 돌아다녔으리라.
뒤늦게--그들은 이미 떠났는데-- ‘巨匠’을 邂逅하는 요행수를 바라며 ‘은성’을 더러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자리를 옮겼고,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장사를 그냥 끌고 나가는 때였다.
그래도 매상 올려주지 않는 내가 가면, 이명숙 여사(최불암의 모친)가 “참 깨끗한 청년”이라며 반겨주었다.
(부끄러울 것도 없는 젊은 날의 초상 한 점.)
누가 그랬다. 박재삼의 한풀이, 가난 타령이 지겹다고.
얘는, 그게 삶인 걸. 삶이 글이 될 게고.
그는 가난했거든. 그는 슬펐거든.
윤동주의 ‘八福’이라는 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도돌이표 여덟 번 반복한 후...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왜 박재삼 같은 모국어의 제관이 ‘시’로는 밥벌이가 안되어 바둑 관전평을 써야 했던가? 나쁜 세상. 나는 한국을 떠난 지 32년, 그동안 cosmopolitan의 언어인 영어를 익히지 못하고--동창회에서는 이메일을 영어로 보낸다-- 모국어만 잊어버렸다. 망명중인 솔제니친이 러시아의 문학과 인권에 대해서 강의하며 벌이는 잘 했겠으나 ‘글’이랄 만한 것을 남기지 못했다. ‘땅’을 떠났으니까.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일하는데, 그 한국어는 그때 그 말이 아니다. 박재삼 순 촌놈, 국산 땅개, 또 뭐라고 모욕할지 얼른 생각나지 않지만, 에이 그, 찌그러진 두레박 같은 화상을 나의 교사로 모실 생각하니까, 좀 그렇다. 도리 있나, 모국어의 서러운 아름다움이랄까, 자지러지는 가락을 배우자니, 그만한 선생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춘향이 속곳 본 사람?
너무 말이 많았지? 그만 하자.
무언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