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사월이 오면 4.19와 연계하여 신문 잡지에서 즐겨 싣는 시가 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가 그것이다.
가야할 껍데기가 무엇이고 남을만한 알맹이는 무엇인지 사람이나 당파마다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작년에는 고국의 탄핵정국 및 총선거와 맞물려 우습지도 않게 아전인수 식 해설이 분분했다.
알맹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껍데기가 진치고 있으면서 뭐라고 할까?
“죄송합니다. 저는 가짜입니다. 워낙 진짜가 없는 세상이라 어떻게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는데, 언제라도 진짜가 오면 저는 물러가야지요. 이렇게 있기는 하지만, 저도 불편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겠네.
온갖 껍데기가 저마다 알맹이인 척 하니까 참 시끄럽다. ‘교계’를 포함해서 사회 각 분야에서 개혁 대상자들이 개혁 나팔을 독점하고 있으니 그게 무슨 개혁이겠는가.
에이, 고놈, 성미 하고는...
아무리 급하기로서니...
이건 아냐. 뭐가 보여야 가지.
예수님께서 꼭 ‘껍데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껍데기는 가라”라는 의미로 자주 말씀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껍데기 천지라는 게 따지고 둘러봐야 알만한 것이겠는가.
알곡이 있어야 할 곳에 쭉정이가 있고, 알맹이가 있어야 할텐데 껍데기만 널려있는 게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아무렴 예수님이 ‘사람’을 미워하셨을까 마는, 그분은 바리새인과 불편한 관계임을 숨기시지 않았다.
“너희 위선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저주까지 하셨다.
헬라어 ‘히포크리테스’라는 말은 본래 ‘분장한 배우’라는 뜻이었는데, 영어 ‘hypocrite'는 '위선’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겉을 꾸밈’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셨다.
오죽하면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셨을까?
무덤을 좋게 보이기 위해서 회칠도 하고, 평토장하여 산소가 없는 것처럼 꾸미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썩어가는 시신이 있다는 얘긴데, 안팎이 다름을 지적하는 말로는 심하다 싶을 정도이다.
바리새인이라는 계층의 위선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호하고자 했던 규례와 전통과 형식들도 예수님의 청산 대상에 포함되었다. 말하자면, “껍데기는 가라”라는 구호의 표적이었다.
그 율법과 규례라는 게 처음에는 필요한 것들이었다.
형식도 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복음이라는 알맹이를 누르고 가리기 때문에--마치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듯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껍데기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있던 껍데기가 생명을 억압한다면, 그 껍데기는 생명의 반대편에 선 죽음의 세력이 된 것이다.
우리는 살림 공동체를 시작했다.
그것은 살리는(giving life) 숨이고, 살림하는(keeping life) 몸이며, 나누고(sharing) 섬기는(serving) 손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이라면, 껍데기의 극복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깨지고 찢어지는 아픔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안’이 아니라 ‘본질 회복’이고,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는 생명의 승리이고, 허위의식을 몰아내고 진실로 삶을 채우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괴롭더라도 기피할 수 없는 사명이다.
그러나, 체제 비판이나 ‘이웃집’을 가리키는 손가락질이어서는 안되고, 먼저 제 삶에서, 가정에서, 예배공동체에서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껍데기는 가라”로 외쳐야겠다.
변화의 속도가 지지부진하여 ‘도대체 개혁이란 가능한가’라는 회의와 패배감이 찾아올 때도 있겠으나, 성화(聖化)란 처음부터 사람이 이룰 ‘과제’는 아니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歷史, 그리고 役事)에 편승하면 되는 것이다.
(참고: 시작한 살림공동체는 자라지 못한 채 껍데기가 되어가고 있다. 화석화된 태아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