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도 가라?
‘껍질’은 무른 물체의 거죽을 싸고 있는, 질기지만 딱딱하지 않은 물질의 켜를 나타내는 말이다. 사과 껍질 같은 거.
‘껍데기’는 달걀, 조개, 소라, 호두 등의 겉을 둘러싼 딱딱한 물질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왕년에 유행하던 노래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는 잘못된 거네. ‘돼지 껍데기’라는 요즘 뜨는 접시는 ‘돼지 껍질’이 옳겠고.
그런데, ‘껍데기’에는 다른 뜻도 있다. 알맹이는 빼내고 겉에 남은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면, “껍데기는 가라”는 의미로 “껍질도 가라”라고 해야 되겠는지?
좀 다른 얘긴데, 화투 패의 끗수 없는 것도 껍질이라고 그러던가.
그 껍질도 어떤 이들은 껍데기라고 그러는데, 고스톱 판에서 “껍데기는 가라” 했다가는 국진, 싸리, 오동 껍질들이 뭐라고 그러게? “거 참 껍데기의 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먼.”
난 할 줄 모르고, 그냥 들은 얘긴데, 껍질이 없으면 ‘피박’을 있는 대로 뒤집어쓰고, 따블, 따따블에 장신 없이 흔들려서 지갑 다 털린다고 그러대. 손에 수두룩하게 들고 있는 광을 남 가진 껍질에게 내어줘야 하는 일도 생기고.
아이들 말로 ‘퀸카’, ‘킹카’처럼 들리기 위해 광도 ‘쾅’이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이가 있던데, 어느 나라의 정치판을 보니까 ‘쾅’이 형편없이 밀리던 걸.
그때도 그랬잖아? 예수님께서 마을마다 훑으시면서 ‘껍질’을 모으셨는데, 그 기세가 굉장했어. 그때 무슨 방송, 인터넷, 셀폰 같은 게 있었나? 그래도 한번 집회에 오천 명이 모이고 그랬어.
“옛날에 유대 땅에 주 예수 다닐 때 그 은혜 받으려고 큰 무리 모였네 눈먼 자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으니 나 같은 죄인까지 그 은혜 받도다”(찬 417).
그러니까, ‘껍질’들은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순 날 것 같은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헤롯, 가야바 같은 ‘쾅’들, 그리고 나름대로 크고 작은 ‘일진’회랄까 잘 나가는 기득권 층은 ‘예수 운동’을 원천 봉쇄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나사렛 사람을 잡아 처형함으로써 새 역사는 싹이 뭉개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지?
‘태생적 한계’라는 게 그런 말인가 보다.
손에 비광 들고 태어난 사람은 ‘쾅’으로 살며 생각하고, 흑싸리피 들고 난 사람은 ‘껍질’로 살며 생각하더라고.
부자가, 기득권자가, 권력자라고 구원받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 잘 믿고 따르기가 쉽지 않던 걸.
기왕 ‘껍질’ 변호에 나섰으니까, 한마디 더하지.
어떤 것은 알맹이와 껍질의 구분이 명확치 않거든. ‘본질’이라고 어디 숨겨져 있는 게 아니고, 그저 그런 시시한 현상들이 모여서 ‘속알’을 이루게 되더라고. 양파의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껍질을 벗기다 보면, 뭐 남는 게 있던가?
그래서 얘긴데, “작은 일, 시시한 일상, 귀찮고 성가신 과정은 다 빼고 보람 있는 일, 궁극적 관심에 몰두하자?”
어디 그렇게 살게 되는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라고 그러셨다. 작은 일을 잘 하면 큰 일을 맡기실 것이다(cf. 마 25:21).
그러니, “왜 내게는 큰 책임을 맡기지 않고 시시한 잡일이나 시킵니까?”라고 그럴 게 아니네.
덕이 높은 고승들을 보면, 사미(沙彌)로 시작해서 부엌데기 구박데기 거치는 동안 가르침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상좌(上佐)가 되어도 스승 수발이나 하던데, 그런 걸 잘하는 사람이 수행을 잘해서 잘 되더라고.
그리고, 껍질이라기 보다는 ‘깍지’라고 해야 되겠는데, 깍지가 있고 나서 콩알이 들어차더라고. 이삭이 패고 들어차려면 먼저 껍질이 있어야 되겠더라고. 옥수수도 낟알이 여물기 전에 껍질과 수염이 즐비하던 걸.
그러니, 껍질? 그거 필요한 거네.
항간의 말로 “이왕이면 다홍치마”니, “때깔 좋은 게 먹기도 좋다”니 하던데, 껍질도 껍질 나름이겠네.
좀 비약이다 싶지만, 형식? 그거 필요한 거네. 형식이 있어야 내용을 담지.
옛적에 서영춘이라는 익살꾼이 그러던 걸. “인천 앞 바다가 다 사이다라도 컵(고뿌) 없이는 못 마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