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살--는 그렇게 (먹혀) 없어지고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똥>라는 게 있었지?
  ...어느 날 강아지똥은 민들레 싹과 사귐을 시작했습니다. 
민들레는 부탁합니다.  “(샛노랗게 빛나는 예쁜 꽃을 피우자면,) 네가 거름이 되어줘야 한단다.  너의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봄비가 줄곧 내리는 동안 강아지똥은 자디잘게 부서지고,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의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고... 
에이, 그 얘기는 그만하면 됐네. 

 

한 구절 덧붙일까? 
스물 세 살 윤동주가 그랬지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게 ‘살림’이지.  남 살리면 그 삶 안에서 저도 살고, 영원을 사모하는 이는 영원히 산다니까.

아, 그 ‘사랑’이라는 말이 나와서 얘긴데, ‘사랑 愛’가 본래는 ‘아낄 애’였어. 
우리말로 ‘사랑’이라고 해도 그러네,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그 뜻이거든.  뭐, ‘남녀가 서로 애틋이 그리워한다’같은 건 파생적 의미이고.

 

아끼고 위한다는 게 ‘마음’으로만 되겠어?  제 목숨 바쳐야 딴 생명 살리지.  피를 흘리지 않는데 어떻게 ‘남’의 속으로 스며들 수 있겠어? 
요즘은 그런 노래 잘 부르지 않아, 너무 진하고 부담스러우니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몸값(贖錢)을 치르고 살길을 주었다.”  계속할까?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아무렴 그게 감사헌금, 십일조 내라는 거겠어?
“널 위해 죽었으니 잘 살아야 돼, 생명을 지켜야 돼, 네 생각에 놀라운 사랑 받아 산 것 같으면, 너도 네 몸을 주렴.”

 

시인 문정희가 여름밤 제 아들과 나란히 누워 들려준 얘기를 시로 썼다.


      나는 우렁이 얘기를 한다.
      “옛날에 옛날에 새끼 우렁이가
      야곰야곰 어미 우렁이를 다 파먹어서
      마침내 어미 우렁이는 껍데기만 남았더래. 그래서       
      텅 빈 어미 우렁이가 냇물에 동동 떠내려가자
      그것을 본 새끼 우렁이가
      ‘야, 우리 엄마 보트놀이 한다’고 깔깔 웃더래”
      아이는 재미나서 와락 달려들며
      ‘야, 어미 우렁이 파먹자’ 하고 간지럼을 먹이는데
      문득 온몸을 비틀며
      내가 파먹어 멀리 떠내려 가 버린
      내 어미 우렁이가 그리워
      천길 낭떠러지로 별이 떨어진다.

 

좀 그렇지?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온 게 어머니를 먹이 삼아 자란 거라는 생각이 언짢아? 
그러면, 우리 주님의 말씀을 받기가 어렵겠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밥’이다.  이 밥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밥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 6:51). 
개신교에서는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하지는 않지만--그것 잘못된 거야--, 끼니마다, 밥 한 사발 비울 때마다 그 말씀과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고전 11:24)를 기억하고, “주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신 것이니 받아먹고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