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그동안 시간이 없었고, 지금은 돈이 없어서, 이렇다 할 만한 데를 다녀보지 못했다. 유럽도 못 가봤고, 일본도 갈아타기 위해서 동경에 하루 머문 적이 있을 뿐, 가고 싶은 교토도 들려보지 못했다. 약간의 여유라도 생기면, 모시지 못하는 아버님을 뵈러 가야 하니, 한눈팔 수 없었다.
료안지(龍安寺)나 금각사의 정원도 사진으로만 보고 동경하는 형편이지만, 이렇다 할 규모는 아니더라도 정원에다가 자갈 무더기라도 좀 쌓아놓고 싶다. 난이나 수석 같은 걸 모으고 가꿀 형편도 아니고, 정원도 돈 들여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정도의 꿈은 꾸었다. 무너진 흙담 앞에 자갈과 구들 돌로 장독대를 만들고, 정지까지 사이는 모래를 깔고, 그러나 고무신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선기와 같은 것으로 징검돌을 놓고, 억새, 부들, 버들강아지, 도라지꽃 같은 게 더러 솟은 뒤꼍... 그게 미국에서는 이루기 쉽지 않겠네.
지금은 남양주시에 속하는가 몰라, 능내 역에서 내려 마재를 넘으면 한강을 앞에 두고 넓은 벌판이 나타났다. 시오리 상류인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서 기세 좋게 내려오는 물이 장마철에는 이 벌을 가득 채운다. 물이 빠지고 나면, 어떤 해에는 자갈이, 다른 해에는 덜 깎여 뾰족한 돌들이, 또 다른 해에는 모래가 벌판을 덮었다. (팔당댐으로 수몰되기 이전 얘기.) 방학 때 고향에 가자면, 나룻배로 강을 건넌 후에 또 십리 정도 벌을 지나야 큰댁에 이를 수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다른 짐을 메거나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갈들을 들고 걸어갔다. 큰어머니는 반갑다는 표정과 함께 “그깐 돌은 왜 들고 오누? 벌에 쌘 게 돌인데...” 라는 핀잔으로 나를 맞으시곤 했다. 그 돌들이 오이지를 누르는데, 발꿈치의 각질을 깎는데 쓰이기도 했고, 묻어 놓고 거기다가 (지성으로) 오줌을 누다 보면 활석이 된다고 하여 실험도 했다. 한번은 담 넘어가는 구렁이--천천히 움직이는 듯 한데 온데 간데 없다, 하니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는 말이 생겼겠지--를 겨냥하여 던지다가 독을 깨기도 했다.
자갈. 꼭 둥글어서 좋은 것도 아니다. 뭐랄까, 모피를 쓰다듬는 것보다는 돌의 촉감이 훨씬 낫다.
완도에는 몽돌을 반출하지 못하도록 검색 초소도 있다고 그러는데, 저마다 몇 개씩이라도 들고 가겠다면 아무리 지천이라도 남아나지 못하리라. 한국 같지는 않고 뭐든지 풍부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자갈 한 트럭쯤 사다가 붓고 싶어도, 자연물을 채취하는 일에 나까지 끼여들지는 말자. 기회가 되면 돌과 모래로 만들어진 정원 한번 들려보고, 마음에 진한 영상으로 남겨두면 될 일이다. 예쁜 여자라고 해도 “참 예쁘구나!” 하고 그냥 지나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