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가난한 청년이었지만
70 미리 상영 가능 대형 스크린이라는 대한극장에서 ‘의사 지바고'를 보던 시절, 우리는 가난했다.
그때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별의별--‘벼라별’이라고 해야 기분 나지만-- 짓을 다해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로 용서받을 수 있었던 때이다. “차가운 밤하늘에 웃음을 팔더라도”가 ‘영자의 전성시대’로 바뀌는 동안, 그 손가락질 당하는 이들은 우리의 누이이고 애인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돈 되는 일이라고 독일 탄광이나 월남전 특수로 ‘해외진출’이 열렸는가 하면, 한강의 기적에 공돌이와 공순이의 젊음이 매몰되는 세월이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는 뭐, 그냥 가난하지만 대학 물 먹은 청년이라고 해두지... 사법고시,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 같으면 행정고시--촌으로 가면 일약 군수가 되는 길-- 패스--‘장원’일 필요도 없는 거야--에 목을 매달았거나, 그런 식으로 ‘개인의 영달’을 꾀하지 않는 이들은 ‘같이 잘 사는 길’이라고 믿는 일에 어느 정도의 시간, 관심, 힘을 쏟았다. 야학, 노조 같은 일. 그리고, 세월이 지나--좋구나, 쥐구멍에도...-- ‘점령군’이 된 전업 투사들은 ‘민주화 운동’에 매달렸다.
아, 지바고 얘기였지.
‘치사한 놈’은, 그러니까 ‘A 코마로프스키’--부정관사의 용례로 ‘코마로프스키 같이 비열한 인간’으로 읽을 수 있겠다. ‘삼위일체 영문법'은 “An Edison cannot become a Shakespeare.”라고 가르치지 않았는가--는 개인적 관계를 통해서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
파샤? 그런 애들은 ‘시대’를 망친다. 그의 고상한 혁명의 이상은 스트레니코프라는 적군 사령관이 되어 피의 광기를 조성한다. 된 게 없잖아? 많은 이들은 의미 없이 희생 당하고, 그 자신도 탈영병의 처형처럼 시시한 죽음을 맞았을 것이고.
고아였던 지바고(유리)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의사가 되겠다고 그랬다. (망막 전문 안과의가 됐지 아마?) 기회가 되면 ‘인도주의자’로 봉사할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인문주의자’로 예술을 즐기면 되는 이였다.
토냐와 라라 사이를 오간 것? 그야 ‘숙명’이었던 걸 어쩌겠는가? ‘얼음궁전’ 시절...
아, 그 때를 Macrocosmos로 읽으면, 공산주의라는 엄청난 실험이 시작한 때였는데, microcosmos의 수준에서는 이어질 듯 끊어지고 만 사랑이 있었다. 모든 차원에서 여러 종류의 실험은 늘 계속된다. 누적적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실패한 것을 반복하게 되고.
우리는 안 그랬던가,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뭉게구름 피어나듯 사랑이 일고... 그것도 반복될 것이다. 개혁, 탄핵, 천도 같은 사건 일지와는 별도로. 그게 무슨 상관? 서부전선 이상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