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익청(香遠益淸)

 

그 노래도 모른다.  그냥 제목이 좋아서 아는 척 하며 가끔 써먹는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유행가 가락을 주절거린다고 신령하지 못하다고 그러는데,
아, 愛蓮說까지 읊어야 하랴?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연꽃을 사랑한다.”

 

싹싹하지 않다고, 자주 문안하지 않는다고, 화내는 사람들.

 

아아, 나는 사람들과 가까이 오래 있기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는 늘 그리워한다.

 

   

 

 

그를 만나게 되면, 그는 나와 오래 이야기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임이 드러날까 봐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쫓으려고 할 것이다. 

그는 정말 많이 안다. 

상대적으로 독서량이 많은 이들--조선 블로그에 발 디뎌놓고 깜짝 놀랐다, 굉장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우와--이 있겠고 장서를 자랑할 만한 이들도 있겠으나, 그는 정말 많이 안다.  그도 물론 많이 읽었을 것이다. 

앎.  읽어서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느낌’이 달라야... 

‘알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는 아담이 이브를 아는 관계를 가리키기도 했다.  

원초적 본능,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사람을 사랑하고.

 

그의 학력?  00상고 나온 분의 반에도 모자란다. 

어릴 적에 너무 약해서 학교에 가 앉아있을 수가 없었기에. 

소학교 훈도(訓導)이셨던 어른으로부터 집안에서 배움을 쌓았다. 

그런데 어찌 그리 됐을까?  그는 정말 ‘됐다’.

 

‘쯩’이 없으니까, 그는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못했다. 

허약해서 학교를 가지 못했던 사람이 막노동판에서 일을 한다.  비 와서 공치고 아파서 공치고... 

한때 한문 실력으로 사주쟁이를 한 적도 있다.  벌이라기보다 불쌍한 여자들에게 희망을 파는. 

지금도 그는 빈곤과 질병과 파도처럼 밀려오고 안개처럼 싸고있는 억울함으로 시달린다.

 

그와 어떻게 만났는지?  나는 ‘金眞淑’이란 아이디로, 그는 ‘lotus’란 아이디로 사이버 바둑판에서 만났다. 

“불자?”라고 물었다.  ‘연꽃’이라는 아이디로 미루어. 

“아니고, 주렴계의 ‘애련설’을 좋아하기에...” 

어, 이 사람 봐라...  그렇게 시작된 ‘힘 겨루기’이었다.  바둑은 안 두고... 

해서 이메일 주소를 주고, 첫 글 ‘자기 소개’가 날라왔다.  편지를 닫는 인사가 그랬다.  
  항상 건강하시며,
  어제는 오늘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그리워하며,
  오늘은 내일의 희망을 가꾸는 진실한 나날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그 후 서로 교통하기 위해서 블로그를 개설했다. 

사람들 들어와서 보라는 데가 아니고 그와의 채팅 룸인 셈이었다.  그나마 끊어졌다. 

그에게 컴퓨터를 ‘보유할 실력’이 없기에.

 

여행길에 그를 만나기는 했다.  그때 나는 유세중인 대선 후보가 지방 유지를 만나는 만큼 시간을 할애했다. 

나쁜 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먹기는 하나, 누워지내는 건 아닌지?  나를 미워하는 걸까...

연락두절.


 

 

 

 

그가 그랬다.

 

  여백의 미학 - 홍탁(烘托)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종교사상에서는 궁극의 자리를 비워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궁극의 자리를 비워놓는다는 것은 설사 궁극의 존재가 있을지라도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않다--
  無極而太極처럼 말하는 것이지 직접으로 그것을 지칭하지 않는 것이다.

 

  궁극의 자리를 비워놓는다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는 여백으로 나타난다.
  여백(餘白)이라는 것은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라
  최고의 궁극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무(絶對無)로 그냥 텅 비워놓는 것도 아니다.
  (.....)

 

 ‘홍탁(烘托)’은 ‘홍어+탁주’ 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홍월탁운(烘月托雲)이나 홍운탁월(烘雲托月)을 말하는 것이다.
 
  청나라 초기의 문필가 김성탄(金聖嘆)이 감탄해마지 않았던 홍탁의 묘법(描法),

 

  밤하늘을 그림에 옮기자면
  밝은 달과 달빛을 받은 구름을 그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으로 밤하늘을 그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할까?

 

  구름에 조금 가려진 달을 그려놓으면
  구름은 달에 의지하고 달은 구름에 의해서 형상이 드러나서
  밤하늘을 나타내고있는 것이다.

 

  해운대 바다를 그리려고 한다면
  돛단배 갈매기 갯바위 파도 백사장 이런 것을 그릴 수 있을 뿐이고
  물만 가득한 바다를 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바다 자체를 그릴 수 있지만
  갯바위와 여기에 부딪치는 하얀 파도 ,
  그것은 바위와 파도를 그린 것에 불과하다.

 

  날씨가 쾌청한 날,
  나폴레옹이 유배되어 삶을 마감했다는 대서양의 고도 Saint Helena 상공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두 장의 사진으로 찍었다면,
  항공사진 전문가를 제외하고

  사진으로 나타난 하늘과 바다를 구별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천양지차(天壤之差)같은 천해지차(天海之差)이지만.

 

  옛선사들의 이야기에 달을 가리키니 달은 안보고 손가락을 쳐다본다는 말처럼
  진실을 전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전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는 궁즉통(窮卽通)은 궁하면 통하는 것이 아니라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卽變,變卽通,通卽久)
  窮과 通 사이에는 變이라는 요소가 들어있어야 한다.

 

  존재(Being)보다는 生成變轉死滅(Becoming)이 내가 바라보는 진리의 세계이며,
  전쟁과 사랑에서도 빈자리를 남겨두는 여백이
  절대진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진리로 다가가는 것이라 여겨진다.

 

  어떤 경우에도 궁극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불가능하기에
  홍탁의 묘법(描法)을 통해서 나타내고있다.

 

  예술의 진정한 생명은 궁극의 빈자리를 홍탁으로 전해주는 세계이며,
  홍탁을 넘어서는 그 세계를 보면서 감동하는 것이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내가 뭐라 했겠노?  허무 개그.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인사하던 이들처럼...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했는데,
  청산은 상대적으로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변하는 것.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상정하지 않으면,
  변화를 측정할 수도, 알 길도 없으니까요.
  ‘궁극’ 혹은 ‘절대’란 그래서 ‘없다 할 수 없는 것’

 

 

다른 얘기 하나.

 

--그--

 

  요즘에는 엿장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등에다 엿판을 메고 다니는 나이가 든 사람,
  리어카를 끌고 다니던 사람,
  그들은 자신의 출현을 가위소리로 알렸다.

  엿장수가 들고 다니는 가위는 무게가 꽤 나가는 것인데
  그것을 한 손에 들고 가위질을 능숙하게 한다는 것은 상당한 연습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생긴 것은 가위인데 가위의 용도는 소리를 내는 물건이고,
  엿을 자르거나 떼어내는데 직접 사용하지 않고 끌에 마치질을 하는데 쓴다.

 

  길거리에서 엿장수가 사라지게된 시기에 등장했던 것이 제주 밀감이었다.
  밀감이 대량생산되면서 엿은 판매가 부진해서 도태된 것이라 추측된다.
  엿장수의 생존권은 어느 누구의 관심도 없는 가운데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되었다.
  (.....)

 

  흰 고무신, 유리조각, 쇠붙이, 갈색 맥주병...
  엿장수가 즐겨 가져가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어디에 쓰려고 가져갔을까,
  (.....)

 

  엿장수 마음대로,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생각하고 받아들여서
  본래의 자기모습으로 새롭게 나타내는 것이 아름다움의 표현이다.
  남의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은 인용이고
  그것을 자신의 소리로 전환시켜주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다.

 

  심미안을 갖지 못하는 표현행위는 아무리 잘해도 앵무새의 울음이며
  엉터리 가위질에 불과하다.

 

  진정한 가위질은 가위날로 물건을 자르지 않는 엿장수의 가위질이다.
  허공을 자르는 가위소리가 그립기도하다.

 

--나--

 

  허공을 자르는 가위 소리... 멋져라.
  그 허공이란 토막을 쌓은 것일까,
  그냥 이음새 없는,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눠진 적이 없는 것일까.

 

  “엿 먹어라”는 말 때문에 엿 먹기 싫어졌는데,
  벽장의 냉기 속에서 보관된 엿 함지를 꺼내서
  못을 대고 톡톡 치다 보면
  사방으로 파편이 튀는데
  고걸 검지 끝으로 꾹꾹 눌러 찍어 먹으며
  장판 위를 치우지 않으면
  버선짝이나 요에 들러붙게 되고 그랬지요?

 

  깨진 백철 솥... 

 

--그--
 
  벽장 속의 냉기도 그리워집니다.
  그 속에는 꿀단지도 들어있었고
  홍시도 나왔으며
  용돈도 그곳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깨진 백철솥도 주요품목이었습니다. 


 

 

 

 

다른 얘기 하나

 

--나--

 

많은 가시로 찌른 사람이었다.
아프다는 사람에게
“가시밭길인지 몰랐어?”라고 그런다.
다시, 또 다시, 선인장 끌어안기로?
선인장은 그렇게 생긴 것인데.

 

--그--

사소한 농담에 남모르게 상처를 입는 날이면
찾아가는 마을교회가 있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산기슭 따라 걷다가 작은 시내를 건너고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낙엽 지는 곳이다.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개망초에 잡초도 자라며,

저녁놀이 물들면 반 고흐가 놀러오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모차르트도 찾아오는 곳이다.

욕망의 절제는 평화이지만
슬픔의 절제는 더 쓰라린 것.

 

[욕망의 절제?  날 두고 한 얘기.  근데 아냐.]
[슬픔의 절제?  그의 얘기.  미안해.  애이불상(哀而不傷)!]

 

--나--
        
싸리에 흙 발라 만든 굴뚝에 파리 떼가 붙어서 온기를 즐기듯이,
우리 이제 따뜻한 것, 그리고 잔광 같은 것이 필요한 때가 되어... 

 

 

(Vincent van Gogh, 'Harv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