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대비(大慈大悲)
장일순의 난초
화공이 아니니까 솜씨를 놓고 얘기할 것은 아니지만, 유홍준은 장일순을 두고 ‘우리 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라고 했다. 그려, 굉장한가 보네?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에게서 회초리를 맞으며 글씨를 배웠고, 감옥에서 나온 뒤에 “나 수상한 짓 안 하고 이렇게 세월 보냅니다.”라는 뜻으로 먹장난(戱墨)한 것이니, 글쎄...
장일순의 난초는 민화도, 선화도, 약화도 아니다. 누구라도 형체는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냥 ‘그림’이라고 하면 됐다. 그 난초엔 꼭 꽃이 있는데, 그게 영락없는 사람 얼굴이다. 여자? 대자대비의 보살상이니까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는데, “그게 무슨 사람 얼굴이냐?”라고 해도 할 말 없는 터에 성별 따지게 됐나. 아무튼, 사람 얼굴이라면, 보통은 슬픈 기색, 더러는 “나 지금 아주 괜찮아”라는 넉넉한 모습, 무사(武士) 정인(情人) 앞에 무릎꿇은 일본 기생의 표정, 잠든 아기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자세, 등으로 나타난다. 얼굴이 아니라면 그것은 빛. 아, 등경(燈檠)에 걸린 촛불이라 할까, 王자 위에 꼭지가 달려 主가 되게 하는 그 불꽃처럼.
글씨? “목에 힘 빼 그래야 살아”라는 글(도솔 간 <좁쌀 한 알>, 196쪽에 실림)이 있던데, 나와다니는 그의 글씨들을 보면 힘은 없지만 무게가 느껴지는 것도 있고, 무게가 없는데 힘은 넘치는 것도 있고, 빠르지만 가볍지 않은 것, 늦지만 움직이기는 하는 것, 등, 그렇고 그렇다.
그렇고 그러면 아주 괜찮은 것. 무위당(无爲堂)--하는 일 없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되는 일/안 되는 일 따질 것도 없고--이라는 호를 즐겨 썼고, 말년에는 일속자(一粟子)--좁쌀 한 알--라 그러기도 했다.
뒤늦게 빛 보더니 만리타국의 내게까지 전달되었구나.
幽蘭不以無人息其香
“깊은 골 난초가 사람 자취 없어도 그 향기를 그치지 않네.”
사랑은 슬픔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가르쳐주면 알까?
사랑이 슬픔으로 바뀌는 게 아녜요.
사랑은 슬픔.
슬픔이라 사랑이고.
기쁨이라면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
헤세드(chesed)는 인애(仁愛)보다 자비(慈悲)로 옮겼어야.
얼마나 사랑이 컸으면 그만큼 슬픔이 깊었을까?
그분의 이름은 대자대비(大慈大悲, The Most Merciful).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도다.
보살
지는 잎
떨림에도
자지러지는
여린 마음이지만
견딜 것이라면
십자가의 무게가
누르지 못하는
몸
Mother of God, or Papa le bon Dieu?
그렇게 넉넉하신 마음,
그래서 울음도 많으신 분,
젖은 눈으로 웃으시는 얼굴을 두고
아버지냐 어머니냐 할 것 없잖아
Ave verum corpus natum de Maria Virgine.
vere passum immolatum in cruce pro homine:
cuius latum perforatum fluxit aqua et sanguine:
esto nobis praegustatum mortis in examine.
O Iesu dulcis! O Iesu pie! O Iesu fili Mari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