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신부님
내가 처음 만난 카톨리시즘은 Karl Rahner, Edward Schillebeecks, Hans Kung, 등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그건 카톨릭 아닌 데요.”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로마 교회가 자폐증을 극복하고 문자 그대로 보편적 교회상을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대화 수용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교회로서의 회복 노력 자체를 ‘세속화’와 ‘프로테스탄트 화’로 매도 냉소하는지 나로서는 잘 모를 일이다. 나는 여러 해 전에 그런 얘기가 통하는 현장을 떠났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그가 교리성 장관에 임명되기 전에 나는 이미 그 이름을 들었다. 당시 토론토에 있는 St. Michael's College(Basilian)와 Regis College(Jesuit)에는 중남미에서 쫓겨난 사제들 여럿이 공부하고 있었고, 나는 Gregory Baum, Leslie Dewart 교수 등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 Josef Razinger라는 이름이 예쁘게 들릴 분위기가 아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다른 전통적인 칭호로 부르지는 않더라도 (로마) 교회의 수장이시고 현실 정치의 지도자이시니, 그분께 대하여 뭐라 하기가 그렇다. 일차적인 이해당사자도 아니고.
갑자기 두 신부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슨 지속적인 긴밀한 교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때아니게 가랑잎 한 장이 날라 오듯 기억의 창고 저편에서 메모지 한 장이 날아와 앞에 떨어졌다.
고종옥(마태오) 신부님.
지난 세모에 돌아가셨다. 74세이셨나. 1976년부터 이태쯤 나의 신혼 가정을 몇 번 들리셨다. “나 밥은 먹었어. 그냥 좀 들릴게.” 하고서 자니 워커 한 병을 들고 오시면, 정말 잘 떠드셨다. “헌병 장교 출신을 왜 주교로 세웠냐 하면...” 같은 얘기.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에, 그거 들은 얘긴데...”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의자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그러다 보면 바닥 1/4쯤 남긴 병을 두고 떠나셨다. 한참 후에 “가만, 그 예전에 두고 간 것 아직 있나?”라는 전화도 왔고. 그분이 이런저런 책들--주로 젊은 날의 추억 단상, 이북 실정 등으로 꾸민--을 펴내시기 전에 원고를 볼 기회도 있었는데, “뭐, 별로...”로 지나가곤 했다. 말년에 외롭고 당뇨로 고생하셨는데, 찾아뵙지 못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잠시라도 머물기를 원하셨는데, 알아뵙지 못한 때라 모시지를 못했다.
깁슨(Arthur Gibson) 신부님.
내 석사 논문이 첫 번에 통과되지 못할 때에 심사위원으로 들어오셔서 처음 뵙게 되었다. 떨어트리고는 나와서 껄껄 웃으시며 “자네 속에 든 것을 캐낼 사람은 나밖에 없지.”라고 하셨다. 나중에 평가서에 “그가 무엇이 될지가 기대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이미 가진 것 때문에 나는 놀람을 금할 수 없다”라고 적으셨다. 그래서 박사과정을 그분과 함께 나아가게 되었다. “네 영어와 타자 실력 가지고는 안 되겠으니, 내가 쳐줄게. 밖에서는 쪽 당 삼 불 한다며? 나한테는 이 불만 내라.”라고 그러실 때에도, 그 이 불을 아까워하곤 그랬다. 본당 신부가 아닌 수도회 소속이었기에 궁하셨을 것이고, 그때는 나도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니까. 그랬는데, 어느 해 여름 휴가를 마치고 연구실을 들리니, 문패가 바뀐 거라. 이런저런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고.
사소한 인연들을 들먹거릴 것도 없다. 고마운 어른들이 그렇게 떠나셨는데... 이별을 예감하지 못하니까 인사를 치르지 못하는 것이다. 평소에 잘 해야 하는 것인데.
아, 베네딕트 16세. 그때 그 자리에 계실 때와는 달라야 할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