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 바람 쐬기

열다섯 명 정도 들어가면 꽉 찬 느낌이 드는 곳인데, 그것도 못 채운다. 
‘남은 자(remnant)’라고 할까, 아이 예뻐라.
‘그루터기에서 난 싹’이라고 해두자.

 

 

           

             예배,
             먹고,
             놀이,
             또 먹고,
             시시한 얘기들 나눴다.

             그 얘기.  너무 시시해서 시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시시한 것들을 버리기로 하면 남을 게 없다.

 

 


소풍은 공동체의 놀이이다.  같이 가기에 즐거운 것이고.  같이 먹고, 놀고, 좋구나.  공동체의 공동체 됨이 가장 잘 드러나면서 “이렇게 모여 사니 좋구나”를 느끼는 게 언제이겠는가?  잔치 때거든.  소풍은 말하자면 야외에서 가지는 잔치였다.  박초시의 환갑, 김진사 댁 셋째 딸 시집가는 날, 그런 식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아니고,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살아있고, 모여 있음을 감사하며 즐기는 모든 이들을 위한, 모든 이들에 의한, 모든 이들의 잔치였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모든 이들의 잔치...  그냥 놀자는 건 아니다.  그냥 먹자는 건 아니다.  합쳐서, 놀고 먹자는 건 아니다.  잔치를 하자면 먹을 게 있어야 하고, 그러자면 농사라는 힘든 일을 해야 하는데, 그 농사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품앗이와 품갚음을 두레라는 조직을 통해서 했잖아?  그러니까 일할 때도 같이, 놀 때도 같이, 그런 게 공동체이고, 예전엔 다 그렇게 살았다.

 

실은 놀이만 즐거운 게 아니고, 일도 즐거운 거지... 일은 할 만한 것이고, 함께 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고 그랬다. 

 

밋밋하게 보이는 일상의 일들 가운데에서 범상하지 않은 삶의 의미와 감사를 발견하는 삶이 복된 삶이다.  왜, 두레박이라고 그러잖아?  공동체가 같이 희락과 화평과 감사의 샘을 두레박으로 길어내는 것이 예배라고.  그래서 일이 예배이고, 놀이도 예배이고, 노동과 삶이 하나가 되고, 예배가 삶에서 분리된 칸에 갇혀있지 않고, 내가 공동체와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지으심을 받은 것을 알고, 그 함께 있음을 기뻐하고, 더불어 성숙해지는 것, 그것이 우리 마을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예배는 바람 쐬기,

들숨과 날숨으로 숨 한번 제대로 쉬기.
儀典이 아닌 듯,
그래도 誠과 敬으로 드리는 禮.
놀이에 몰두한 아이들처럼
다른 목적 없이 즐기는 유희 동안
절대 타자를 내 안에 모시기.
‘더불어 삶’이 부담이 되지 않는 이웃.
베풂과 나눔을 의식하지 않는 섬김.
행복한 피로감으로 잠자리에 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