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고만 살 수는 없지만
라마 나욧에 숨어 있던 사무엘 선지를 생각해보는데...
그래도 덮인 우물, 막힌 방, 닫힌 굴보다는 사방이 뚫린 데가 내겐 더 좋을 것 같다.
“竹林에 사방이 트인 草堂을 지은 분이 있으면 절 좀 불러주세요.
그대의 가족, 전답과 육축을 위해서도 기도해드릴 테니.”
라고 광고를 냈던 것은 아닌데,
집도 절도 없는 친구는 柳禹錫의 <陋室銘>을 얼른 타전했다.
춘당 김용운 서
산은 높지 않아도(山不在高),
신선이 살고 있으면 이름이 나며(有仙則名).
물은 깊지 않아도(水不在深),
용이 살고 있으면 신령스러워지고(有龍則靈).
이곳은 비록 누추한 집이지만(斯是陋室),
오직 나의 덕에서 뿜는 향기가 있어 누추하지 않다(惟吾德馨).
이끼자국은 계단 위까지 올라와 초록빛을 띠고(苔痕上階綠),
풀잎은 발 속으로 들어와 푸른빛을 띤다(草色入簾靑).
함께 담소하는 사람들 중에는 큰 뜻을 아는 선비가 있고(談笑有鴻儒),
왕래하는 사람들 중에 무뢰배는 없다(往來無白丁).
조용히 거문고를 타고(可以調素琴),
경전을 읽을 수 있다(閱金經).
화려한 관현악기 연주소리에 귀를 어지럽히는 일도 없고(無絲竹之亂耳),
관청의 공문서가 몸을 피로하게 하는 일도 없다(無案牘之勞形).
남양의 제갈량의 초가에 비길만하고(南陽諸葛廬),
서촉 자운의 정자에 비길만도 하다(西蜀子雲亭).
공자가 말하길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 (孔子云: [何陋之有?])
그 후 “강진에 (이천만 원 주고 산) 누옥이 있습니다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서 3월에 다녀왔다.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나?
후당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것도 내 집.
일상을 담지는 않지만
거리를 두고 싶을 때 찾는 곳.
정기 제전이 이루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