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장미
웬 일로 격려까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푸른 장미는 없소. 그건 원예가들의 오랜 꿈인데, 아직은...”이라고 그랬더니,
가인의 말씀인즉, “당신이 만들지 그래요.”
“............”(有口無言)
그건 안 되는 거잖아?
‘Blue rose’는 “그런 건 없다”라는 뜻이다.
없으면 없는 것이다.
없으면 만들라? 내가 무슨 해병대도 아니고.
더러 성공했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이게 ‘파랑’이 아니고 뭐겠어요?”라는 의기양양함에 대하여 사계의 반응은 시원찮다.
“아닌데, 그건 아직...”
뭐가 아직?
나라면, “그만 하면, 푸른 장미로 봐줄 수 있겠는데...”할 것이다.
(우리 집에도 있다.)
흑장미?
그것도 없다지만,
검붉으면 됐지,
새까만, 정말 까만 장미 생기면 좋기도 하겠다.
푸름을 왜 꼭 장미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게 그렇더라.
뭐가? 설마 그 도덕가들의 재빠른 교훈 만들기가 나한테도 통할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사는 집 초롱 속에 들어있네, 우리 집 비둘기가 파랗던 걸...” 같은 얘기.
안 들어도 그만이지만, 그래, 뭐,
가는 데까지 가자는 얘기.
돈키호테, Man of La Mancha, 원탁의 기사, 뭐 그런 성배(聖杯)를 찾아 나서는 기사들 얘기 말야.
그, 그게 어떻다고?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구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보속(補贖)은 되지 않았겠느냐는.
행위 구원이냐, 자력(自力) 구원이냐
우리 그런 것 문제삼지 말고,
저 가상(架上)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분도 계시지만,
미래완료진행형인 구원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 없고,
갈 때까지 가자는 거지,
하루에 하루치씩 살면서.
하는 데까지 하면 된다고.
놀다가 “밥 다 됐는데...”라는 소리 들리면,
싹싹하게 들어와서 저녁상에 둘러앉으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