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카타

 

FM도 없던 시절에

VUNC(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에서 밤 9시에 한 시간 선심 쓰는 ‘명곡의 향연’을 즐겨 청취하였다. 

 

그 후 음악감상실이라는 데를 출입했다. 
르네상스, 아폴로, 대학가의 다방들(학림, 빅토리아, 미뇽,..), 설파, 가화,

나중에 생긴 감상실들(필하모닉, 티롤), 대구의 녹향, 하이맡... 
50원 입장료(음료 포함)가 없어서 DJ를 하고 싶다고 그랬다. 
좋아하는 음악을 원 없이 듣고 싶어서 그랬지 보수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고가의 원판에 스크래치 낼 수도 있으니 30,000원을 예치하라고 그러네,
무료봉사하겠다는 사람에게.

 

캐나다에 이주하여 공장에서 일하면서 두 주일마다 지급되는 봉급을 받으면
‘Sam the Record Man’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일년 동안 모은 ‘원판’이 650장. 
그 후 공부, 0회, 결혼하고 살림하느라 별로 보태지 못했다. 
이십 년 캐나다 생활을 정리하면서 1,300여장쯤 될까 하는 LP를 지휘자였던 H집사에게 주었다.
말로는 “꼭 돌아오셔야 돼요.  그때까지 잘 보관할게요.”라는 인사가 있었는데, 돌아가지 못했으니.

 

0회에 전념하겠다고 음악 같은 것은 음락 정도로 여기자고 그랬는데,

제 버릇 남 주지 못해서 CD를 다시 모으게 되었다. 

이젠 소장품(?)을 팔아야 할 처지.

 

 

갑자기 Helmut Walcha의 올간 연주를 듣고 싶다. 
그는 악보를 보지 못한다.  눈이 멀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연주하는가.  Bach의 올간, 쳄발로 전 작품을 왼다. 
처음엔 어떻게?  아내가 피아노로 친 것을 듣고 암기하여. 

예전에는 Walcha의 LP 몇 장을 가지고 있었다. 
재킷에 박힌 그의 연주하는 모습이 그렇게 경건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기 때에 좋은 소리를 들어서 그랬는지,
아이들이 자라면서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기타, 등 조금씩들 했다. 
형편이 그렇지 못해서 알려진 교사에게서 레슨을 받지는 못했는데,
동네 음악학원에서는 아들 형제들을 천재 취급해주었다(후진 ‘동네’이니까). 
고등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음악을 전공으로 택할 정도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우리 작은 예배당에는 올간도, 피아노도 없다.
아, 풍금이 있지.  벙어리...

 

고전음악 애호가라는 딱지를 뗀지 오래 된 줄 알았는데... 

 

‘The heart is a lonely hunter’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축음기, 유성기... 같은 말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