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너 알짜 황당이여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춥고 긴 겨울이 지나 드디어 동토(凍土)에 봄이 올 때에
피어오르는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축복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꽃만 하더라도 그렇다. 
겨울 내내 팬지, 스냅드래건, 등 밖에서 볼 수 있는 ‘빛깔’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 내밀었는지 모르는 싹이 어느새 꽃을 치켜든 모습을 보며
호들갑 떨 기회를 얻지 못한다. 
힘겹게 달고 있는 꽃들의 무게로 꺾어질까 안쓰럽던 가지가
밤새 내린 비로 털 깎은 양처럼 되어버린 것을 보면서
미워하는 마음으로 돌아서던 것을 기억이나 하는지?

 

오월.
어디서라도 장미를 볼 수 있는 달이다.
예쁠 것도 없는?  굳이 장미라야?
그렇다니까, 흔해지면 대접을 못 받거든.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릴케는 왜 장미를 두고 ‘순수한 모순’이라고 그랬을까? 

 

꽃과 가시라는 부자연스러운 적대 관계가
기묘한 공존으로 서로 인정하고 받쳐 주기 때문이 아닐는지? 
상함 받기 쉬움과 상처주기 쉬움을 한 가지에 지니고 있네. 

사람도 그렇더라고. 
그 날 세운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은 사람이던 걸. 
하긴 교제라는 것이 사람을 ‘품어야’ 하니까 아프지만.

 

‘가시’라는 것도 그렇다. 
무슨 종족 보존의 방어 수단 정도로 그 예리한 공격성만 돋보이는 듯 싶지만,
아, 그 가시는 ‘자기’를 찌르자는 것이었는데... 

 

높은 곳에 위치해서 스타(star)이라면,
‘스-타(스스로 타락한 사람)’가 되지 않도록 어떻게 품위를 유지해야 되겠어? 
‘약점’을 돋보이면 되거든. 
“가진 것이 많아도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깨우침에 “아멘”할 수 있으면 되거든.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시겠다고?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상 공동 번역, 고후12: 7~10)
 

마침 장미 철이니까 장미 예찬이 있었던 것이지, 
장미말고는 꽃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잖아. 

 

내 집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들꽃이 한창이지? 
정리되지 않은 잔디밭에 무단 침입한 꽃들이 너무 예쁘다.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잡초’라고 부르지는 말자. 
식물도감이나 백과사전을 뒤적이지 말고, 이름을 붙여주자. 
당신이 이름을 부름으로써 ‘의미’로 다가온 것이
이제 당신의 마음으로 침입할 것이다. 
길들이고 익숙해짐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고 품으시지.

 

아, 꽃들. 
여름이 가지 않았고, 꽃들은 지지 않았는데,
꽃밭을 떠나야 하는 때가 먼저 오는가. 

 

손톱에 박힌 가시는 빼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