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리 (2)
second year jinx라는 게 있다.
프로 신참이 초년에는 제법 열심히 뛰었는데, 뭘 좀 보여주겠다고 ‘오버’해서 그런가,
다음 해에는 영 시원치가 않은 것을 두고 나온 말이다.
우리야 뭐 새삼스레 인정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 그저 제 할 만큼 하면 되는 것이다.
기록이야 숨길 수도 없는 것이고, 슈퍼스타는 아니지만 그만 해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 나이에 어디 전처럼 뛸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하긴 은퇴 시기를 놓친 왕년의 인기 선수가 대단찮은 연봉을 눈치밥 얻어먹듯 하며
미운둥이 노릇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우리가 언제는 힘으로 뛰었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슥 4: 6).
‘힘’이라고 해도 그렇다.
사람들은 갈렙을 칭찬한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수 14: 10~12)
라는 구절을 들먹이며.
실제로는 “늙은이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라는 시선을 던지지만.
어린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숨바꼭질의 묘미는 꼭꼭 숨었는데도 찾아내는 데에 있다.
정말 깊이 숨어 찾을 수가 없다면 흥이 깨지는 것이다.
옛적에 나는 spoilsport이었다.
동무들이 나를 도무지 찾지 못했다.
그리고는 “못 찾겠다 따까리~”라고 선언하지도 않고 흩어지는 바람에,
땅거미 진 공터에 나와 보니 혼자인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귀양갔든지 낙향했든지 그렇게 은거한다는 선비들이 남긴 글을 보면, 대개 그렇다.
벼슬에 맘이 없고 강호에 묻혀 사는 재미가 괜찮다고 하면서도,
“불러만 주신다면...”이다.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없고.
숨어있는 아이가 “어디 있니?”라는 소리를 듣고,
“안 가르쳐 줘.”라고 외치면,
그게 저 있는 데로 찾아와서 데려가라는 얘기 아니겠는가?
그 왜 그런 게임도 있었지.
“눈감고서 팔 벌려 여기저기 찾는다 나 여기 선 줄 모르고 여기 저기 찾는다”라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술래는 그를 놀리는 이를 바보스러운 동작으로 잡으려는...
나는 이제 술래의 코앞에서 알씬거리다가,
마구 휘두르는 팔에 닿기만 해도 아주 걸려든 것처럼,
그를 얼싸안고 싶다.
그런데, 왜 나를 건드리지 못하지?
나는 좀 쉬고 싶었다. 그래서 무단 조퇴했다.
“괜찮아, 푹 쉬어.”라는 소리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처음엔 잡으러 다니더니, 잘 잡히지 않자 영구 퇴출 해버렸다.
이게 뭐 노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에게도 미안하고, 사람들 보기도 그렇고, 재미없네.
팔베개하고 누워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불렀고,
새삼스레 “쑥부쟁이 피었구나, 언덕에”로 눈이 돌아갔다.
이하 이준관의 시이다.
쑥부쟁이 피었구나, 언덕에
쑥부쟁이야, 너를 보니
모두들 소식이 궁금하구나.
늙은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를 파고들던
달빛은 잘 있는가.
전봇대에 오줌을 갈기던 개는
달을 보고 걸걸걸 잘 짖어대는가.
해거리를 하는 감나무에
올해는 유난히 감이 많이 열렸는가.
볼때기에 저녁 밥풀을 잔뜩 묻히고 나와
아아아아 산을 향해
제 친구를 부르던 까까머리 소년은
잘 있는가.
그게 그러니까, 그랬었다는 얘기.
어쩐지 잘 풀릴 것 같다.
영자에게 무슨 전성시대가 따로 있었던가?
지금부터 잘 살면 되는 거지.
기분 좋게 쉰 건 아니지만,
오히려 쫓기는 마음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공은 좀 갈무리한 것 같은데...
부딪혀봐야지.
올해는
햇볕 넉넉하고
바람 너그러워
맛든 열매
많이 낼 것 같다.
(그런데, 부르는 사람이 없네,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