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인력(引力)
인격신을 믿는 이들이라면 ‘섭리(攝理, Providence)’라고 부르며,
세계가 움직이고 인생이 나아가는 행로를
우연과 운명의 이중주로 여기는 이들이라도
천명(天命)의 안배(按排) 정도는 인정하는,
그런 ‘뜻’과 ‘손길’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하늘이 도울 수도 있고, 말릴 수도 있고, 꺾을 수도 있고,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일으킬 수는 없는 것.
사람이 뜻을 세우는 것이다.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천운(天運)이나 기연(機緣)도 없다.
운이 겹치는 것은 받는 사람의 능력이며,
굴러온 복을 차는 것은 무능하기 때문이다.
촉망받았어도 인연이 미치지 못했으면 파계하여 도망하는 것이고,
법문(法門)을 피해야 할 입장이라면
속가 제자(俗家 弟子)도 자처하지 못할 터이다.
의문과 포기를 반복하는 자에게 어찌 정진(精進)이 가능하겠는가.
세상이 아름답다거나
따로 즐길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공부로 무엇을 이룰 것 같지 않아서,
나도 맘만 먹으면 절망할 줄 안다는 것을
대단한 재주나 되는 것처럼 내세우며,
일찍이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를 읊었다.
그것을 무슨 허무주의라 하기도 우습고,
공집(空執)이랄 것도 없겠지.
꽃잎의 팔랑거림은 끝나지 않고,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
땅에 닿기까지
그 낙하 시간이
어째 그리 길게 느껴지냐.
무애무(無碍舞) 한 마당
원 없이 즐겼더라도,
피곤함을 어찌 하랴.
궁핍함도 감당치 못하겠네.
그게 다
발걸음 그리로 돌리자고 끄는 힘이었음을.
“이에 스스로 돌이켜”(눅 15: 17)...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1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