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晩鐘), 그리고 인민예술(1)
장 프랑소아 밀레의 그림은 지방 도시의 음식점이나 이발소에 걸릴 만큼 대중적인 것이다.
그렇게 흔한 만큼, 우리는 자랄 때에 단원의 그림은 몰랐어도 ‘이삭줍기’나 ‘만종’은 누구라도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 ‘대중적’이라는 말은
“(무작위로 추출한) 불특정 다수가 저항이나 반감 없이 즐길 만한 것으로 택할 수 있는”의 뜻으로 받으면 되겠는데,
예술가들은 ‘대중적’이라는 말을 무슨 모욕처럼 여기는 것 같다. ‘대중적 = 통속적’으로 받는 모양이다.
서울 음대 교수이고 오페라 단장이던 박인수가 정지용의 ‘향수’에 곡을 붙인 노래를 ‘카수’--‘가수’와 구별하는 뜻으로--와 함께 불렀을 때에 빗발치던 비난이 그런 맥락에서였으리라.
이제는 한국처럼 묵향을 즐기는 고전의 나라(그런가?)가 아닌 다음에야 고전음악이 설자리를 잃었고,
그렇게 훈련받은 이들이라도 크로스오버 쯤으로 인기와 수입을 얻어야 할 판이 되었지만.
자, 그럼 ‘예술’이란 무엇이겠는가?
미적 가치를 향수(享受, 즐기는, enjoy)하는 것이겠다.
아름다움이 유발하는 흥이 없다면 그것이 어찌 예술이겠는가?
제작자 이외에 아무도 즐기지 않는,
당대에는 ‘뭘 모르는 이들’이 알아주지 않았다고 치고 후대에서조차 아무도 쾌감(pleasure)을 느끼지 않는,
그런 작품이 ‘흔치 않음’이라는 부가가치 때문에 걸작이 될 수 있겠는가?
밀레가 처음부터 ‘인기’ 작가였던 것은 아니다.
나채화나 규방화(閨房畵)를 그렸지만 잘 나가지도 않아서, 배고픈 시절이 꽤 길었다.
그 유명한 ‘만종’이라는 그림과 얽힌 얘기 한 토막.
한참 굶주리던 시절에 밀레보다 화단에 앞서 진출한 루소가 찾아 왔다.
“여보게, 기뻐해 주게. 지네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있네.”
무명의 화가 밀레는 친구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게 정말인가?”
(“내 그림을 돈 내고 가져갈 사람이 있단 말이지?”
실의의 시절에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대하여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반응할 것이다.)
루소는 돈을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구매인이 사정이 있어서 오지를 못했네. 내가 대신 가져다 주기로 했네.”
당시 300프랑이라면 거금이었는데, 덕분에 밀레는 한동안 배고픔을 잊었다고.
(다 얘기하면 촌스럽지만, 눈치 없이 “그래서요?”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요구를 무시하니까 대중과 격리된다.)
몇 년이 지난 뒤, 밀레는 루소의 집을 찾아갔다. 그때 친구의 방에 자신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교훈? 그런 건 당신이 알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