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과 인민예술(3)

  
'인민예술'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야기가 매끄럽게 시작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실은 박수근을 이야기하자면 꼭 그 말을 써야 할 것 같다. 

 

굳이 ‘인민’ 혹은 ‘인민예술’이라는 말을 골라야 하겠는지? 

그 사람들이 썼다고 해서 ‘동무’라는 말에 무슨 원죄가 있는 것은 아니듯이,

인민이라는 말도 냉전시대에는 쓰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것은 공산주의를 가리키는 상징어가 아니다. 

무산계급의 독재를 지향하는 이들이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말 자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중성적인, 무색한 말이다. 

누가 그들의 독점 사용권을 인정해주었는가? 

링컨은 그러지 않았던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정부)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중국 헌법이 공민과 인민을 구분하고 있듯이, 인민은 국민과는 다른 말이다. 
그러면, ‘민중’이나 ‘대중’이라는 말을 쓰면 되지, 하필 ‘인민’이냐? 

그게 “꼭 그것이라야”라는 얘기는 아니다. 

 

예수님의 전도 대상이었고, 그를 따르던 무리를 가리키는 말로 마가복음에 나오는 ‘오클로스’라는

헬라어를 옮기기에 ‘인민’이라는 말이 가장 무난하지 않겠느냐는 내 생각이다. 

굳이 사회, 경제, 문화적 혜택에 따른 계층 분화나 지배와 수탈, 저항과 투쟁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가난한 서민들,

허리 한번 펴봤으면 좋겠는데 평생 벗지 못한 등짐으로 구부정하게 된 중늙은이,

악다구니 퍼부어도 용서하는데 빠른 아낙네,

군대 다녀왔다고 평생 개정판을 찍어낼 만큼 끊임없이 무용담을 산출하는 아저씨,

속이기도 하지만 속는 경우가 더 많은 대체로 선량한 장꾼,

‘문화’ 때문에 카드 빚이 늘어난 청년,

그리고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에 나옴직한,

뭐 그런 이들을 통틀어 “제가 뭔데, 인민 아냐?” 라는 뜻이다.

 


‘인민예술’이라는 말도 그렇다. 

조인공에서는 작가의 등급을 매겨--그 참 이상하네, 계급 타파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항상 훈작(勳爵)과 서열을 매겨야 속이 시원할까?-- 작가, 상급작가,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 등으로 나누는 모양인데,

내가 채택한 말의 의미는 그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누구라도 좋아하는,

그렇다고 ‘대중예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얼이 박혀있는,

껍질만 보고서는 속알의 튼실함을 잘 알지 못하지만 알 만한 이들은 알아주는,

그러니까 좋은 줄은 알지만 얼마나 좋은 줄은 다들 알아보지 못하는,

그래도 좋기만 한,

굳이 추상(抽象)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날것이 그대로 소재가 되는,

비릿한 냄새나는,

잘 섞지 않아서 오동 삼 채나 흑싸리 석 장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짭쪼롬한 간에 아작아작 씹히는, 젓갈류, 그리고 마늘쫑이나 매실장아찌 같은,

맛있고, 멋있는,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잘 모르면서도 다들 아는 것 같은 게 ‘인민예술’ 아닌가? 

 

그걸 왜 몰라? 

그런 게 있다면, ‘인민예술’보다 더 좋은 지칭을 찾아보라고.

 

아, 밀레 얘기에서 박수근으로 번져나가게 된 이유? 

그는 열두 살 때에 <만종>--물론, 질이 나쁜 복사판이었겠지--을 보고 너무 감격해서

자기도 커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뭐, 밀레가 본받을 만한 화가이어서라기 보다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소년이 그 그림의 종교적 정서에 감동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박수근은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었던가? 

아니다. 

밀레는 처음부터 ‘대중예술’ 쪽이었고, 박수근은 ‘인민예술’로 갔다. 

기법?  그런 걸로 비교할 것 있는가. 

박수근에게는 양구 깡촌의 소학교 ‘도화’ 시간에 배운 것이 ‘학습’의 전부인데. 

그러니, 뭐 기교랄 것도 없고, 그저 ‘난  대로 빠진 대로’였다.

 

뭘 그렸겠니? 

나무를 그려도 여름철 성장(盛裝)한 것을 고를 것이지 잎 떨어져 헐벗은 나무,

그 아래로 함지를 이고 돌아가는 여인을 그렸다. 

어떤 여인이라고? 

물긷고, 빨래하고, 절구질하고, 맷돌질하고, 아기 업고 서성거리고, 좌판 벌린 아낙네들,

우리 어머니와 누이를 그렸다. 

논뚝길 같은 가리마 아래로 드러난 이마가 보기 좋던 시절의 여인들. 

성내도 노기를 담지 않은 선한 눈매, 까딱하면 그렁그렁 고인 것이 방울 되어 떨어질 것 같은 그런 눈의 사내? 

황소?  그런 것을 그렸다. 

그들이 사는 자리인 모이 쪼는 닭들이 있는 마당, 꼬방 동네, 시장을 그렸고.  

 

어렵던 시절에 미군 PX에서 ‘간판쟁이’ 취급을 당하며 싸구려 초상화를 그리던 박수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박완서는 그를 소재로 하여

나중에 그녀의 문인으로서 출세작이 된 <나목>을 써낸다.

생전에 알아주는 이가 없었던 화가의 작품이 뒤늦게 천문학적 액수의 고가로 팔리는 것을 보고

뭔가 남겨야 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림 한 점이 웬만한 집 한 채보다 비싸서야...)

 

‘인민예술’이란 말로 박수근만 따로 골라내니까 미안하다. 

얼른 이중섭, 김환기 같은 이름들이 떠오르는데,

그들은 숨길 수 없는, 그래서 마음껏 뽐냈던 ‘천재’였고,

박수근은 '그저 그랬었기에'... 

(그들의 예술은 ‘깨꽃’이 아니라 ‘살비아’라고 불러줘야 할 것이었고.) 

 

아, 꽃 이름이 나와서 얘긴데,

그 최고회의와 유솜 빌딩에서 중앙청으로 가는 신작로(세종로)에 꼭 팬지를 심어야 했던가? 

주먹봉숭아, 맨드라미, (도심지에선 좀 그렇겠지만) 달맞이꽃, 뭐 그런 것들이 거기 있으면 안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