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고백’이라는 말 좀 뜯어보자고. 
사전적 정의로는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함”이면 되겠네. 

고백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무슨 고백이 있겠어? 
죄와 잘못의 고백이 있겠지. 

그리고? 
안 해보셨나?  사랑 고백이 있잖아.

 

그게 어려운가봐.  박혜경이 부른 ‘고백’이란 노래가 그렇게 나가지? 
    말해야 하는데 네 앞에 서면 아무 말 못하는 내가 미워져
    용기를 내야해 후회하지 않게 조금씩 너에게 다가가 날 고백해야 해. 

 

아프고 떨리는 건데, 잘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원태연의 ‘누군가 다시 만나야 한다면’이라는 시. 

    누군가 다시 만나야 한다면
    다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여전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당연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또 너를
    허나
    다시 누군가와 이별해야 한다면
    다시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 한다면
    두 번 죽어도 너와는...... 

 

잘 노네.  그런 건 시인이니까 그만큼 한다고 치고,
‘안-시인’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까? 

‘The Late Night Show with David Letterman처럼
종이를 버려 가는 식으로 진행하자면 백 장도 더 버려야 되겠네. 

“당신을 만나면서 나의 삶이 특별해졌어요. 
모든 일이 즐겁고 잘 될 것만 같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것?  버려. 
“네가 내 미소와 마음과 미움까지도 다 가져 가버렸어. 
알 수 있니?  너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버린걸...“ 
버려. 
“우리가 만나서 사랑했던 날보다 앞으로 사랑할 날들이 더욱 많이 남아서
난 오늘 너무 행복해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요.” 
그것도 버려. 

 

한가지 묻겠는데, 당신은 제가 버린 말들보다 더 잘할 수 있겠는지? 
금방 소개한 것들이 누가 한 말인지 일러드릴까? 
서울 어느 꽃집에서 꽃과 함께 배달되는 카드에 인쇄된 말들이라고. 

그러면, 왜 그런 말, 그야말로 ‘빈 말’을 소개했겠냐고? 
이제 우리는 광고 문안이나 상업적인 문구보다 못한 고백은
아예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는 억울함 때문이라고. 
부풀리거나 세련되지 않고서는 진실을 표현할 수 없을까?


 

본래 ‘고백하다’로 옮겨지는 라틴어 동사 confiteri는
‘잘못을 자백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70인 역 구약 성경에서 쓰이던 헬라어 ‘exomologein(감사를 표하다, 선덕을 칭송하다)’를 옮긴 말이다. 

 

이런저런 고백의 의미를 돌아보았는데, 고백은 어떤 ‘관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진실을
정성을 다해서 드러내는 말이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바로 그러한 고백을 요구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다. 
그렇게 알아주는 것만 해도 괜찮은 거야. 
배울 만하고 믿을 만하니까 ‘선생님’이라고 그랬겠지. 
그런데, 랍비는 수없이 많고, 그 중에 존경할 만한 이들을 꼽으라고 해도 여럿이었겠으니,
‘랍비’라는 칭호만으로는 “당신만을” 혹은 “오로지 그분만을”이라는
고백적 의미의 관계를 이루지 못했겠네.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고백’이 아니다. 
그런 것은 ‘견해’이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무엇이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여론 조사(opinion poll)’이니까. 
“엘리야라고 그러던 데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그래요.” 
“세례요한이 다시 왔다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어요.” 
신이 나서 그런 말을 옮겼을 것이다. 
그 정도만 돼도 예수님께 대해서 최대의 경의를 표한 셈이니까. 

그렇더라도...
그 말들은 고백이 아니라 견해이다.

 

“나는 교인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교훈에 경의를 표하고
그분의 인격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라는 사람들도 많다. 
칭찬이더라도 그건 견해이다. 

신학자들의 전문지식도 견해라고. 

내가 북미주에서 공부를 시작하던 70년대에 남미에서 북상한 ‘해방신학’이란 게 있었다. 
성화랍시고 예수님을 기관총을 겨눈 게릴라로 묘사하고 그랬다. 
실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얌전한 청년처럼 그리는 것에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아무튼, 그런 건 다 견해이다. 

 

견해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불건전한 견해도, 바람직한 견해도, 터무니없는 편견도, 쓸만한 상식이나 전문지식도 있지만,
예수님은 고백을 요구하신다.

 

계속해서 물으셨다. 
누구에게? 
‘제자’들에게.  ‘제자’는 따르는 사람, 배우는 사람이지? 
“그래 남들은 그런 견해를 가졌는데,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백을 요구하신 거야.

 

 

연애하는 사람들이 제일 알고 싶은 게 있다. 
“당신 마음 속에서 나는 무엇?”이다. 

 

만일 어떤 ‘관계’가 성립했는데,
고백은 없고 견해만 무성하다면 그건 정말 피곤한 관계이겠네. 
그건 사랑 이전이라고. 
제가 무슨 성형외과 전문의도 아닌데, 육체의 요모조모를 뜯어 살피면서 평가하고,
성격을 판단하면서 “이건 좋은데 저건 고쳐야 하고...”로 나오는 게 그게 무슨 사랑이겠어? 

‘사랑’ 이야기가 나와서 계속되는 얘기야. 
사랑할 만한 이유들이 있어서 사랑한다면 말이지,
그 이유들이 줄어들면 사랑이 식거나 가버리겠네? 
사랑하기 때문에 이유를 발견하게 되면
이유들이 날마다 늘어나겠구먼.  그게 사랑이겠네.

 

예수님께서 왜 고백을 요구하셨을까?
제자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원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것은 사랑에 대한 물음이었다.

 

 

‘신학(theos + logos)’이 뭐겠어?  하나님 얘기야. 
나는 신학자보다 시인이 하나님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많은 학문적 분석 후에
“그러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일단은 견해이지 고백은 아니라고. 
존재 자체에 대한 직관력이랄까 사랑이랄까 그런 데서 나오는 찬양의 고백,
그게 학문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더라도
더 아름다운 입술의 제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