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라

많은 신학자/철학자들이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라는 논증에 매달렸다. 
가장 그럴 듯한 것으로는 성 안셀모(Anselm, 1033-1109)가 제시한 것이다. 
나는 그의 명작 ‘Cur Deus Homo(Why God became man)’에 대해서
seminar presentation을 한 적이 있는데,
중세철학의 권위자인 당시 지도교수 Eugene Fairweather 신부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내가 네 주장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논점 전개
만큼은

너처럼 그런 명료함(clarity)과 과학실험 보고에나 나오는 정확성(precision)을

가지고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는. 
그 과찬 때문에 ‘불후의 명작’을 내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고,
추고를 거듭하다보니 제출시간을 놓치게 되었다. 
실패담이다. 

 
그때 뭐라고 그랬는지 대부분은 잊어버렸다. 
‘서양’ 것을 공부한다는 것이 그렇다.  외국어 공부도 그렇고. 
어느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나마나’가 되고 만다.

 

 

 

“아담아, 어디 있니?”(창 3: 9)라는 ‘찾음’으로 시작해서
“날 사랑하긴 하는 거야?”(요 21: 17)라는 ‘다짐’으로 맺은
만남의 기록,
그 ‘눈물로 쓴 편지’ 같은 ‘사랑 이야기’가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 14).

 

왜 그랬겠니?


 

‘추상(abstract)’은 도구이다. 
그것은 학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사람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수, 개념 같은 것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는가. 
그러니, 마제 석기를 사용함으로써 ‘공작인(Homo faber)’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추상’을 인지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어쭈, 짐승과는 다른 무엇?”이 된 것이다.  


도구는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무엇을 얻거나 이루게 하는 것이다. 
도구는 ‘중도에 있는 무엇’이지, 그 자체는 목적도, 성취도 아니다. 
도구를 먹는가?  아니. 
그물을 어떻게 먹어?  그물로 잡은 물고기를 먹는다. 
칼을 먹는가?  아니.  칼로 저민 회를 먹는다.

 

삶을 파악하자면 추상이 필요하다. 
삶은 ‘날것’이기에 추상 이전이다. 
삶을 살기에는 삶이면 된다.

 

 

‘신’은 추상이다.  기호이다.  상징이다. 
‘예수’는 ‘날것’이다.  예수는 ‘삶’이다. 
In-carn-ation은 ‘구-체-화(具體化)’로 옮기면 ‘딱’이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논증은, 말하자면, 구속론(救贖論)이다. 
“우리 죄를 대신 지고 형벌 받기 위하여”라는 말로 설명이 되겠는가? 
외계인이 나 대신?  누구에게 어떻게 감사할까?


그분은 눈물과 시련을 체험하셔야 했다. 
죽음을 아셔야 했다. 
그리고, 또? 
‘선택’! 
신이기에?  그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은 필연과 강제로부터 벗어나셔야 했다. 
그러자면,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라는 아픔을 겪으셔야 한다. 
그것이 ‘자유’.


선택이 없이는 ‘사랑’이 성립하지 않는다. 
사랑의 반대? 
미움이 아니고 ‘포기’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서,
사랑하기로, 끝까지 사랑하기로,
죽기로, 그래서 사랑하기로,
그래서 살리기로 택하셨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요일 4: 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