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하는 사랑학 박사

 

한 몸으로, 그것도 병약한 몸으로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안쓰러우면서도 또 얄밉기도 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그럴 만한 분이기도 하다.
사랑 이야기로 많은 감화를 끼친다.
정작 누구와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많은 일들과 사람들에게 시간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그를 두고
“흥, 일만 하는 사랑학 박사야”라고 불렀다.

 

    일이 많아서 사랑할 시간이 없는 사람은
    일을 사랑하는 것일까.
    가진 게 시간밖에 없는 사람과
    사귀고 싶다.

 

시비 걸고 싶었다.

그 귀한 시간의 부스러기를 조금 얻기도 했다.

 

 

그 후 생각해본 건데...

 

성인성녀는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 
집착이 없이 사랑의 담요를 넓게 펴는 사람이다.
제 누울 자리, 혹 둘이 발뻗을 정도가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덮고, 혹은 그 위에 누울 수 있도록. 

 

“그건 사랑도 아냐, 어쩌면 그렇게 말을 잘한담? 
일만 즐기면서...”라고 심통 부렸지만,
맞아, 그분은 성인이시네. 
아틀라스처럼 지구를 들 것은 아니지만,
남보다 더 큰,
그래서 되도록 많은 이들의 아픔을 짊어지려고 했던,
십자가를 감당하신 분이니까.

 

    I love the weight I had to bear,
    Because it needed help of Love.
          (Alfred Tennyson, ‘In Memoriam’)


 

 

왜 또 아프셔야 하는가?

 

부치지 않을 것 같지만, 쓰기는 썼다.

 

    이미 이루신 게 많고 베푸신 게 많으니까,
    “이제부터라도...”라고 흥정하실 삶은 아닌 줄 알지만,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시면서 하늘의 사랑을 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냥 존속하는 게 아니고,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두운 시대에 빛으로 남으셔야 돼요.
    깨어 계시고,
    기회 되면(에구 이 욕심...),
    제게 무용담도 들려주시고.

 

 

그만 하시다고...
아픔이야 가시지 않겠지만...

 

참, 용하다.

 

 

    ‘희망’이란
    액면가치는 있어도 통용가치는 별로라는,
    필요해서 만들었지만 필요하지 않은 게 좋은,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게 더 좋은 일이라 여겼지요.
    님은, 님의 삶은
    포장지가 먼저 있는 빈 상자에다가 내용물을 넣고는
    그 귀한 선물을 많은 이들에게 돌린 것이었습니다.
    성실이라는 연금술로
    희망이라는 지폐가 금화와 같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은총은 금괴가 아니라 사금처럼 받는 것이라서
    모래 열 가마를 걸러 찻술 한 푼 어치를 얻는 것이겠지만,
    무익한 수고 같은 것을 끝내 감당하시고,
    한 줌 얻으셨네요.
    성상에 금박을 입히는데 쓸까,
    아님 의미에 굶주린 이들에게 베풀까,
    그게 이것 아닌가?


 

    아, 이제 우리에게
    사랑하지 못할 사람들이 줄어들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고,
    마음결에 찍힌 흉터들이 흐릿해지고,
    가난이 부끄러울 건 없지만
    쪼들리지는 말고,
    망가진 건강 때문에 한숨짓지 말고,
    약한 이들 도울 수 있는 힘은
    좀 남겨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가슴 떨리는 처음을 확인하자면
    잊었던 아픔이 찾아오겠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했다면,
    내딛는 거지요.
    님은...
    일어나신 거지요?


 

(그렇구나, 그분에게는 그 많은 일들이 다 사랑이었구나.)

 

 

후기: 아슬아슬하지만 무사히 넘어가는 것, 그게 내공 아닌가?
돈후하지 못해서, 인정머리 없는 손속에 상처 입은 적이 많지만,
싸움이 많았던 셈치고는, 잘 견뎠다.
존경이라는 선물을 분홍 포장지로 싸는 실수는,
호의라고 하더라도,
정말 없어야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