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세상 지나가기 (2)
산문(山門)에서나 아직도 쓸까, 부생(浮生)이나 부세(浮世)라는 말은 점점 잊혀가고 있다.
일없이 어려운 말 쓸 게 아니라면, ‘덧없음’이라고 하자.
‘덧’이란 ‘동안’(시간)을 의미하는 의존명사이니 ‘덧-없다’라고 하면,
‘머묾이 없다’, ‘빨리 변하다’라는 뜻이 되겠다.
무상(無常)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그 변함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흐름을 탄다면,
무애(無碍)가 될 것이고.
행운유수(行雲流水)가 그렇겠는데,
세월의 빠름이 그보다 숨찬 느낌으로 다가올 때는
광음여시(光陰如矢)라고 그랬다.
찬송가에서조차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318장)라고 그러지 않던가.
예전 가사로는 “주의 곁에 있을 때”(457장)의 후렴 “빠른 세상 살 동안”을
“광음여류(光陰如流)하오니”라고 그랬다.
몇 해 전에(2001) 태학사에서 정약용의 이런저런 글들을 모아
‘뜬세상의 아름다움’(박무영 옮김)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책을 펴냈다.
(옮긴이가 원문보다 멋을 부린 듯 싶지만, 그래야 누가 읽지, 탓할 건 못 되고.)
자신을 떠다니는 사람(浮浮子)이라고 부르는 나경이란 노인과의 대화로 시작되는 얘기(‘浮菴記’)도 들어있다.
떠돎이 뭐 그리 서글프기만 한 건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할 것도 없고,
에이 뭐, 그랬다고 멈칫할 것도 아니고,
“그래, 좋구나. 잘 가라.”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꽃이 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도 없다면,
그럼 뭐 그리 꽃이 좋겠는가.
“간밤에 불던 바람 만정 도화(滿庭 桃花) 다 지거다”라는 아쉬움이 없고,
참꽃이라고 부르는 것, 진다기에 진달래,
그 서러움이 없으면,
기다림도 없을 것이고,
그리움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아름답다고 할 것도 없겠네.
붙잡지 못하는 줄 알면,
한숨인지 탄성인지 가녀린 숨뱉음과 함께 놓아주는 것이 사는 길이 아닌가.
(길이 아니라도 갈 수야 있겠지. 힘들게,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서툰 밴드라면 피아니시모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점점 여리게(diminuendo)’나 ‘점점 느리게(ritardando)’라는 악상부호가 없는 음악이라면
연주자나 듣는 이나 정말 지겹겠지?
살다가 모자 벗게 되고 자리에서 떠난 후에도,
그럴 수만 있다면, 허락한다면,
다시 ‘조금씩 점점 세게(poco a poco cres.)’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띄엄띄엄 놓인 쉼표에서는 꼴깍 침 한번 삼키고.
경국 치세의 지혜가 있고 임금(정조)의 총애를 입었던 정약용은
소인배들의 미움을 사서 유배와 폐족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도 그는 살았다.
날지 못해도 노래는 부를 수 있었다.
유배지에도 물은 있고, 바람도 있으니까,
물같이 바람같이 살면 되는 것이고.
쉼표에서 딸꾹질 한번하면 될 것인데, 마침표인 줄 알고 빠지는 사람도 있다.
“덧없는 인생 꿈만 같으니, 기쁨이랄 게 얼마나 되리(浮生如夢 爲歡幾何)”라면서도
“꽃에 자리하여 술잔을 돌리며 달 아래 취하고는”
--이백의 ‘春夜宴桃李園序(춘야연도리원서)’--
그걸로 성이 안 차서
달을 껴안겠다고 뛰어들었단 말이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나옹(懶翁)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을 가사로 하여 여러 곡조가 만들어졌고,
캬바레의 춤곡처럼 부르는 가수도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신경림이 살짝 틀은 ‘목계 장터’도 괜찮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그저 그렇게,
산이든지, 물이든지, 바람이든지, 꽃이든지, 돌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