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세상 지나가기(3)

 

워렌 비(베이)티(Warren Beatty).  1937년 생이니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인데,
몇 달 전 본 얼굴로는 순진한 소년의 풋풋한 웃음 같은 표정으로 매력을 풍긴다. 
바람둥이 실력의 급수를 바로 저 표정이 폭로하는지. 

그는 처음 출연한 영화 ‘초원의 빛’(p. 1961)으로 한 걸음에 인기의 정상으로 뛰어올랐다. 
Lincoln Center Honor에 오른 그를 보면서,
(아, John Williams, Joan Sutherland, Elton John, 등이 그 날 같이 대접받던 동기생이었음.)
그리고 아넷 베닝과의 사이에서 난 어린 세 아이들을 보면서,
‘초원의 빛’의 마지막쯤인가 버드(워렌 비티)를 찾아간 윌마(나탈리 우드)를 향하여 아이를 번쩍 안아들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생각났다.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은 워즈워드(한글 표기가 좀 그러네, William Wordsworth)의 시인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에서

한 토막 잘라온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이라는 영화에도 들어갔다.) 

 

영시(무지 길다!)를 그대로 가져오기도 그렇고, 어색하게 옮겨진 것을 길게 늘어놓기도 그렇다.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풀잎의 광휘(光輝), 꽃의 영화(榮華)같은 때를
무엇으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마는
우리 서러워하지 말자고,
뭔가 남겨진 것에서 힘을 얻자고(...)

 

 

(영 시원치 않네, 손 좀 보면 나아질는지...)

 

    반짝이는 풀 같고, 갓 피어난 꽃 같은,
    그런 시절 다시 돌아올 리 없지만,
    우린 슬퍼하지 않으리
    남겨진 것 있어 위로 얻으리니.

 

(여전히 맘에 안 들지만, 그만하고...)

뭘 남겼다고? 
씨, 열매, 자식, 가치, 작품, 추억 같은 것 말야.
간다고, 무(無)로 환원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위로?
응, ‘com-fort’ 라고, ‘더불어 힘 얻기’, ‘같이 강화됨’, 그런 뜻 아닌가?

 

 

그래서, Intimations of Immortality!  불멸의 암시가 아닌가. 

전도서 기자는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3: 11)라고 그랬지.


예전에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찬 410장)에
이 초로(草露) 인생 살 동안 내 갈 길 편할지 혹 환란 고통 당할지 난 알 수 없도다”라는
절이 포함되었었다. 
풀만 해도 그런데, 거기 맺힌 이슬? 
있었던 것 같은데 없어진 줄도 모르는 존재이다.


 

 

시로는 그저 그렇지만, 근대시로서의 역사성을 치자. 
김억(金億, 岸曙)의 “봄은 간다”라는 시를 보자. 
(영화로는 “봄날은 간다”라는 게 있었다는데...)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빈다고, 날개 달린 병거(‘Time's winged chariot’)가 멈추겠는가. 

동서고금의 모든 인생은 무상(無常, transitoriness)의 전횡(專橫)을 어쩌지 못해 모두 울었다. 
성경의 기자들--그걸 얼른 “네, 성령님 말인가요?”라는 모범답안을 내보이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도

마찬가지이었다.

 

인생은 그 날이 풀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 15).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는 풀”(시 90: 6).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사 40: 6; 벧전 1: 24).

 

실은 그 뒤에 뭔가 따라오는 구절이 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 103: 1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 8; 벧전 1: 25).

 

 

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바라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찬 531)의 본래 가사를 보자.


Abide with me: fast falls the eventide;
The darkness deepens, Lord with me abide;


(가사 전체를 다 실리지 못하지만, 다 그렇다.) 
변함과 변하지 않음(혹은 그렇게 바람)이 병렬로 진행된다.  대위법처럼. 
abide, me/ fast, falls, eventide; darkness, deepen/ Lord, me, abide...
(이 찬송가 구절과 관계된 연상은 Alfred North Whitehead의 형이상학의 leit-motif라고 할 수 있다.)

 

 

 

짧은 인생살이에 어느 정도의 고와 락이 어떻게 진행될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싸인, 코싸인 커브를 그리며 왔다가 가는 것을 두고
흥진비래(興盡悲來),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경구(警句)도 만들어두었다. 

그것은 아낭케(Ananke)와 우연의 횡포를 어쩔 수 없어서,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으니 참고 기다려라”라는 ‘교훈’으로
‘허무’라는 공동(空洞)을 메워보려는 가망 없는 시도이다.

 

대안으로는 인격신의 ‘돌보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마 6: 30).

 

 

 

              

 


 

정통 기독교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함석헌은
그의 ‘마음에 부치는 노래’로 도덕의 극성(極盛)을 보여주었다. 
그만해도 아주 괜찮다.

 

    세상이 거친 바다라도
    그 위에 비치는 별이 떠 있느니라
    까불리는 조각배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눈 떠 바라보기를 잊지 마라

 

    역사가 썩어진 흙탕이라도
    그 밑에 기름진 맛이 들었느니라
    딩구는 한 떨기 꽃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뿌리박길 잊지 마라

 

    인생이 가시밭이라도
    그 속에 아늑한 구석이 있느니라
    쫓겨가는 참새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사랑의 보금자리 짓기를 잊지 마라

 

    삶이 봄 풀에 꿈이라도
    그 끝에 맑은 구슬이 맺히느니라
    지나가는 나비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영원의 향기 마시기를 잊지 마라


 

 

                                                            뜬세상 지나가기? 
                                                             어려울 것도 없고, 서운할 것도 없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자동차 여행을 하는 동안, 자주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돼요?”
대답은 보통 두 가지.
“반은 지났다.”와 “거진 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