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꿈 (1)
만보
만사택(滿四澤)과 다기봉(多奇峰)의 경계라고 할까 그런 날이네요.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와서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가신 김춘수 님이
‘춘일만보(春日漫步)’라는 시도 남기셨지만,
어디 봄날이라고 한가로이 거닐 수 있나요?
그저 농투성이들은 보리 거두는 걸 먼저 하랴 모내기를 먼저 하랴
몸을 한 개밖에 못 가진 것이 한스러울 때인데,
저야 밭뙈기랄 것도 없고
봉당에다 꽃씨 뿌리는 대신 푸성귀 모종 몇 개 박은 정도이지만,
그거라도 돌본다고 나왔더니...
아 글쎄, 나비 한 쌍이 춤을 추고 있네요.
“종다리 노래 듣고 봄 나비 한 쌍... 예쁜 꽃에 앉아서 잠깐 쉬고 다시 춰라.”
저건 만보가 아니라 맘보(mambo)구나, 양산도 맘보?
그래도 전 일합니다.
퇴계 어른의 ‘만보(晩步)’ 시간까지는 말이지요.
여기서야 “밥짓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漠漠炊烟生)” 경광(景光)은 없지만요.
꽃의 기억
더러 시들기도 했지만,
오래 전 일도 아닌데,
그리고 남아 있는 것들, 제 때를 기다리며 발돋움하는 것들도 많으니까,
굳이 ‘기억’이란 말로 비감함을 퍼 올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게요, 이름을 모르면 만남도 없었던 건지?
아까 그 아저씨(연세로야 할아버지이시나, 뭐 제겐...)의 노래,
모두 다 잘 아는 것 말이지요, 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럼, 이름 없는 채로 헤어진 것은?
만남 이전인데, 무슨 헤어짐이 있겠냐고요?
(말할 건 아니지만,)
섞임이 있었는데...
이름 없으면
‘무엇’이 될 수 없는 건가?
들꽃 사랑이니 뭐니 해서
이름들 잘 알더라고요.
아무라도 그렇게 불러주는 이름으로
(학명이든지, 속칭이든지, 공용어로 말이지요)
한번 더 불러주는 게
무슨 ‘의미’를 덧붙이는 건 아닐 텐데.
이름 없으면 어때?
내가 너를 살랴
네가 나를 살랴
같이 살아도 따로이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는 건데
눈물을 쳐바르지 않고는
별리의 장면을 연출할 수 없고
화난 척 하려 해도
다시 보면 배시시 웃음이 입가에 붙으면
아 그럼 된 거 아니냐고
--I'm John, you?--
--Mary. Bye.--
그런 게 아니고...
이름을 알았을 때는
전성기를 지난 다음이더라고.
칼라스, 테발디, 스테파노, 코렐리...
한물 간 다음에야 다녀갔지요?
업적 때문에 존경할 것도 없고,
가능성을 고려해서 기대할 것도 없고,
지금 모습을 보면서
“Coo~~~l!”이라고 인사하자고.
볼품 없고 보여줄 것 없는 John & Mary끼리
잘 어울리던 걸요,
위해 주고.
할매라고 피하지 말고,
할배라고 무시하지 않고,
서로 데워 주기.
헤어지거든,
(그래야 되는 거니까...)
“한 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그럴 것 없고,
그렇게 과장할 것 없고,
내 안에 있는 너,
손톱에 박힌 가시로
조금만 아픔을 느끼면,
그럼 되겠는데요.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문덕수, ‘꽃과 언어’)
아휴, 그건 과한 데요.
“...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그려는 게지?
기운이 다하는 걸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