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자리

 

             십자가 곁도 십자가 아래도 십자가이다.  
                             ‘The Crucifixion(Last Judgment)’ by He Qi
                                  www.heqiar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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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 Qi는 중국의 남경신학교에서 가르친다.)

 

 

서울. 
애, 어른 할 것 없이 물 오른 야들야들한 살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 같은 거리에 서서
난 황홀했다.  화원인지 수족관에 온 듯.
내 시선에 유감 있는 여인이라면 “저 늙은이 좀 보게, 주제에...  눈을 확...” 했을까?
그때 난 “아, 예쁘구나.  그러나 미인들은 없구나.”라는 생각으로 막막했는데.
또 터질라...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은 예쁠 수는 있어도 그저 그렇다는 말이다.

 

남자에게 있어 여자라면 어머니, 아내, 애인이라는 상관성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보통 남자라면 신사임당과 황진이와 춘향이라는 조선시대의 세 여인에게서

무슨 대표성이랄까, 모델을 발견할 것이다. 
그 여성들은 유교 문화와 남성 지배 문화가 만들어 낸 허구이다. 


 

어머니날.

 

남자 목사님들 말이지, 본문은 성경에서 가져 왔는데,
내용은 ‘여자 길들이기’ 같은 것들을 ‘어머니날’의 설교로 채택하더라고.

 

당신은 당신의 여인--어머니, 아내 등--에게 꽃과 선물을 드리기도 할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증명을 해 보인 것일까? 
선물은 필요 없으니, 싹싹하게 고백하시오.
“내가 그동안 너무 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언제라도, 누구라도, 여인은 ‘은인’이다. 

“감사합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으나, 따로 해명하지 않을게.)

 

                                 

 ‘어머니 날’에 야단맞고 싶은 어머니가 있겠는가 마는 한 마디 해야겠네. 
“세상 엄마들이 다 바보이더라”라고. 
왜? 
품을 떠난 자식이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리다니, 그게 바보 아니고서야...  
믿을 게 따로 있지,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믿다니.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을 떠나면서 한 약속은 지켜졌다. 
품안에 자식이 떠나면서 “돌아올게요?”라는 말,
그건 “아-암, 내 자식인데 어련하겠나” 하고 나서, 잊어버리면 된다.
그게 그렇게 안되더라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이라 했지만, 그것도 동네 서당에 다닐 때 얘기지,
“그래, 사람되려면 대처로 나가야지?”해서 일단 보내놓으면, 안 돌아오는 걸. 
봄 이슬 동글동글 맺히고, 가을 서리 풀섶에 하얀데,
눈 녹고, 꽃피고, 또 눈 내리고, 그러기를 몇 해 던가,
아주 안 오는 걸까?

 

아, 물론 방학이라고 돌아오고, 명절이라고 돌아오고, 그랬다가 이내 가버린다. 
떠나가는 자식이 어쩌다 돌아보면,
비석거리에 꼼짝 않고 섰던 분이 마치 쫓아버리듯이 손을 홰홰 내저으며 외친다. 
“어여 가~~”라고. 
또, 무슨 바람이라도 불면, 훌쩍 고향집에 나타나겠지만,
그게 품안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잖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자식을 공연히 기다리다가 속절없는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그저 지쳐서 잠깐 눈 좀 붙이겠다고 누웠다가 깊은 잠으로 떨어지는 것이 어머니의 삶이라면,
그게 뭐야?  뭐 사는 게 그래?

 

어머니라고 다 그렇게 사는 건 아니겠지. 
또, “내 인생 따로, 자식 인생 따라”라고 애써 구호처럼 외칠 어머니들이 요샌 제법 많겠지만... 

 

좀 고전적인 취향의 어머니 한 분을 소개하겠다.

 

그분의 아들도 어머니를 떠났다. 
자랄 때 속썩인 적이 없는데... 
태어날 때에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참으로 기대되던 아이였는데... 
다 큰자식 붙잡아둘 수 없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 찾아 나섰다.  그리고 아들을 마침내 만났다.

어디서 만났겠니?  해골산이었다. 

아들은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범법자로 처형되기 위하여 형틀에 달려 죽어가고 있었다. 
왜 그런 자리에 어머니가 있어야 할까?

 

성경은 그 장면을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이...섰는지라”라고 간단하게 증언했다. 

 

라틴어로 <Stabat Mater>라 하여,
그것은 뛰어난 음악가들이 작곡하고,
(얼핏 떠오르는 것만도, Scarlatti, Vivaldi, Bach, Haydn, Rossini, Dvorak, Verdi, Kodaly, Szymanowski, Poulenc,...  숨차다, 그만 하자, 장학 퀴즈도 아니고.)
뛰어난 화가들이 걸작을 내놓은 것들의 제목이 되었다.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어머니!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그 비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심금이 울리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이다.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어머니!  실은 마리아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라도 그 장면을 보면서
그 어머니와 자기를 동형화, 동일시하지 않겠는지?

 

그 어머니는 무력한 어머니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쳐다보면서
그 아들을 구해 낼 아무런 권력도 없는 어머니의 무력과 슬픔과 좌절을 생각해 보라.

그 어머니가 아니라 당신이라면... 


글쎄, 당신은 자식을 위하여 할 만큼 했겠지. 
“아가야, 그저 너만 잘 된다면, 나는, 뭐, 몸이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되도록 뛸 수 있어. 
널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니?” 
그래서 수고했고, 희생했고,
그것도 남들 보기엔 “저 여자 치맛바람이 너무 세잖아?  왜 그렇게 설쳐?” 
그야말로 뭐 널뛰듯 살아왔다. 
그리고 공들인 만큼 결과가 따르니까, 고단한 줄 모르고 견디었다. 
그게 다 자식 농사 잘될 때의 일이다.

 

 

다시 그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자.
사실 그 어머니는 일찍부터 그 아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열두 살 되던 해에 성전에서 남아 학자들과 문답하던 그 아들을 책망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아들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하물며 그 십자가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어머니는 십자가 곁에 섰다. 
거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상상할 필요는 없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마리아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기를 힘썼고
오순절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로서의 꿈은 깨어졌고,
사람으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 모든 체험을 거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육신의 아들로서의 예수에게 투사하였던 육신의 꿈은 사라졌지만,
그 아들에게 퍼부은 헌신적인 사랑은 헛수고인가 했지만,
그 어머니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했다.

 

 

자식에게 입혔던 채색 옷, 곧 어머니의 꿈은 닳거나 찢어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실망하지 말고 기도를 계속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