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꿈(3)
나비는 날아가고
나불나불 날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
날아다니는 빛(날 빛)이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비는 난다.
(나쁜 이름 골라서 붙이지는 않을 테니,
사람도 제 이름만큼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 나비는 난다.
날면 날아간다.
멀리.
꽃만 남는가
(“다른 나비 또 올 텐데”라는 생각은 일단 펴지 말자.)
꽃은 멀뚱하니 바라볼 뿐이다.
나비의 뒷모습을.
꽃은 어디로 가지 못한다.
같이 가는 게 아닌지
떠나는 역(役)과 남을 역이 고정되어 있으니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고 그랬겠지만,
이제야 뭐 그렇겠어?
‘사람’이란 plasticity(可塑性)은 참 놀라운 것이어서
역할 이양, 분담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으니,
이젠 “남자는 다 그래” 할 것 없겠네.
꽃과 나비.
뿌리 박힌 것과 날개 달린 것은
역할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꽃이 나비를 품었듯이
나비는 꽃을 업을 수 없을까.
갈 때 말이지.
같이 가게.
毫生館(호생관) 崔北(최북), ‘초옥산수(草屋山水)’
“空山無人 水流花開”
흐름과 머묾이 둘이 아니고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니,
류류상종(留流相從)이겠구먼.
머묾과 흐름.
상대적 지속성의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게 그것 아닌가.
나눌 수도 없고,
둘인 듯 싶어도 그냥 어울리는.
물은 속에서 스며 나와
옆구리를 간지럼 태우기도 하고
바닥을 핥으며 나아가고,
산이 제 살 베어달라고 애원하면,
짐짓 성난 표정을 지으며
험한 손톱으로 할퀸다.
버티며 바치고 있는 듯한 산도
그렇게 조금씩 허물고 있는 것이다.
늘 젊어 보이려면
조금씩 고쳐야 하거든.
만고상청(萬古常靑)이란
그침 없는 변화로 가능하더라고.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않는고
그래,
잠깐 갇히기도 하고,
정신 없이 놀다가 어두워지기도 하고,
날 새어 떠난다는데
그냥 보내지 못해서
한참 같이 나아가기도 하고,
조금 내어준 듯 싶지만
그만큼 받기도 하면서,
그렇게 어울린 세월을 두고?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게 뭐 강제도 아니고 억지도 아니어서
산 절로 절로 수 절로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졸로.
남명(南冥 曺植)은 이를 두고
“그럼 그럼 아닌 게 없구나(亦非不自然)”라고 하던 걸.
그때 그 님으로 만날 수는 없는 거야
이 내 몸이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까
명사십리 해당화는 다시 가서 또 오는데
이 내 몸은 떠나가니 다시 올까 기약 없네
회심가.
서산대사가 지었다고 하나 모를 얘기고,
이곳 저곳에서 상여 나갈 때 부르던 노래이다.
이런저런 판이 있어...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이 진다고 설워 마라
명년 춘삼월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은 한 번 가면
다시 올 줄 모르더라
가지 마오 가지를 마오
불쌍한 영감아 가지를 마소
보통은 떠나는 이를 두고 야속하다 하지마는
남는 이가 미안해할 것 아닌지?
실은 가는 것이나 남는 것이나
사라지기는 마찬가지.
나중에, 국화 필 때쯤, 해 지나기 전에, 내년에,
돌아오겠다는, ‘꼭’ 자 붙이던 그, 약속 말이지,
온다 치고...
말만이 아니고 왔다 치고...
둘 다 변한 걸.
아니 모습 얘기가 아니고,
변한 게 아니고,
전혀 딴것들이
전설을 들이대더라고.
꽃은 나비
맞아.
나비가 돌아온다고
그때 그 꽃이 남아 있는 건 아니고,
꽃 찾아온 나비가
그 때 그 나비도 아닐 것인데.
그러면 단 한 번의 몸부림,
떠남,
그러고는 알아볼 길이 없는가?
그랬잖아...
녹수는 청산 가운데를 흐르며
청산을 싣고 떠난다고.
나비는 꽃을 품고 가고
꽃은 나비에 실려 간다.
꽃 속에 누우면 꽃 되고
나비 타고 날아가면 나비 되고.
산은 산 물은 물!
어른 말씀이니 “지당 지당” 이겠지만...
꽃은 꽃, 나비는 나비가 아니고,
내 안에 이미 있는 당신이 나를 보는 동안,
그대는 나.
꽃은 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