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명약이라도 부작용이 있으니까,
“의사의 처방 없이는 사용하지 마시오”라는 경고가 부착된 것이다.
뭐라도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을 것이다.
성상(聖像, holy icon).
개신교에서는 ‘우상’이라고 하여
때려부숴야 할 것으로 아는데,
그런 건가?
잘 된 모상(模相)이라도 전모(全貌)는 아니고,
현상이 본질을 가릴 수도 있다.
(사실 그래.)
또 그러셨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 29).
그렇긴 한데,
성인들 보니까,
그들은 그분을 ‘감각적으로’ 경험한 이들이더라고.
내 손을 내밀어 그의 옆구리에 넣는 것 같은.
몸에 무슨 성흔(聖痕)이 생기기도 하고.
그렇더라...
‘먼산바라기’로 사모하던 님 다 잊었어도
손이라도 만지작거린 이가 ‘그 때 그 사람’으로 남던 것을.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고...
바라는 바, 가야 하는 거기, 그 같이 되고 싶은 이, 따라야 할 분,
있는 것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님,
‘사랑’이라 하지 못하겠고, 그렇다고 ‘존경’이라는 말이 구차한
그런 감정의 화살이 날아가는 과녁.
그런 것을 ‘우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러면, 우상은 있어야 하는 것이네.
우상 없는 삶은 재미없겠네, 쓸쓸하겠네, 이룸도 없고.
그런 삶의 궤적은--있기나 하던가 마는-- 검토하자면 짜증나겠네.
어느 정도 자란 나무가 고목을 바라보면서
“나는 언제나 당신만큼 자랄는지 한숨쉬며 발돋움했어요.
아직도 멀었지요?”라고
말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때 되면 비켜줄 줄 아는 어른이
애정에다가 신뢰를 섞어 살짝 데운 것을
무서운 아이? 아니고,
너무 귀여운 아이에게 건네는 장면도
곱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EDS Byron Nelson Tournament에는
‘High-Five’ --5 world's top-ranked golfers--가 참가했다.
사진은 Tiger Woods가 (Lord) Nelson에게 scorecard를 넘겨주는 장면.
“너 같은 천재는 앞으로도 없겠다.”
“어디요? 대선배님을 넘어선 자는 이제껏 없습니다.”
(추측성 기사)
빈천한 소년 클린턴.
명예의 전당에 케네디와 한 줄에 서게 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우상의 발자취를 잘 따라왔구나.
허물이 있긴 하지만,
그도 그를 소망으로 아는 우상숭배자들을 또 양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