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잎의 노래

   
1973년 겨울. 
한국을 떠나기 전에 여비를 번다고 부산에 몇 주 내려가 있을 때이다. 
거기가 그렇지, 어쩌다가 눈이 내려야 소담스러운 함박눈도 아니고 싸라기를 뿌리는 둥 마는 둥 하지만,
그 날 눈이 왔다. 
그런 분위기 때문일까,
음악다방에 홀로 앉아있던 나에게 어떤 여학생이 바닷가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자청했다. 
다대포로 갔다. 
거기서 나는 “해 돋는 바닷가에 물새 발자국”을 불렀다. 
다음에 에덴공원으로 갔다.
(에덴?  거기 못 가는 데잖아? 
신학교 나온 조성기가 셈족 말로 제목 삼은 그 ‘라하트 하헤렙’인가를 두어 지킨다는데...)
우습지도 않게, 신신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이 건넌 것은
홍해(the Red Sea)가 아니라 갈대 바다(reed sea)이다” 라는 주장이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좋고,
을숙도는 갈대 바다이었다. 
갈대 색깔은?  갈빛.  많이 바래기는 했지만, 참 인상적이었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어디선가 내렸고, 나는 따라 내리지 않았다.

 

                                                                                 

                                                                                                    김석만, '을숙도의 갈집'(1960)

                                                                                          http://joonganglib.busan.kr/. ../1960/photo03.htm

                                                                                        

 

 

‘갈대’는 신경림이 대학생 때 써서 등단 작품이 된 것인데, 아직까지 사랑 받는 모양이다. 
윤동주의 시도 그렇지만, 젊은 시인이 쓴 것을 나이 들어 좋아한다고 흉이 될 것까지는 없겠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있었다, 알았다, 몰랐다, 몰랐다...

 

상황에 참여도 하고 그랬다는데, 그런 몸짓과는 제법 떨어진 거리라서,
어느 쪽이 그의 참모습일지 헷갈리지만,
전후 50년대의 폐허에서 실존주의 물을 먹은 청년의 ‘내면화’를 나무랄 것 있겠는가.


 

‘갈대의 순정’이나 ‘갈대의 연가’는 그 흔들림, 기울음, 그러나 꺾이지 않음 때문에
나온 노래들이리라. 

 

이하 박명순의 ‘갈대의 연가’의 부분이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흔들어 보지만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
    당신께 향한 사랑인가 봅니다

    당신께 기울어진 마음
    매몰차게 꺾어보려 하였지만
    그것은 아닌가 봅니다

    사랑은 그렇게 쉼 없이 흔들리며
    젖어 들어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좀 그렇다.

 

 

그 지리산에서 떨어진 고정희는 ‘상한 영혼을 위하여’에서 그랬지?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

 

에휴...  왜?

 


 

 

갈대와 억새는 자라는 곳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너무 다르다. 
많은 이들이 가을 산행에서 만나는 억새 밭을 보고 ‘갈대’를 떠올리는데,
내버려두자.  이름이야 아무렴 어때, 제 기분인데.

 

그래, 억새도 좋다. 
작년에 일년생 억새 모종--애개, 쪼꼬매라--을 12불에 사다가 심었는데,
어쩐 일인지 죽어버렸다.  화단에서는 자라지 않는 모양이다. 
두 달 전에 한국을 떠나기 전 날 지방에 사는 분이 택배로 억새 씨 1 kg을 보내왔는데,
다 가져오지는 못했다.
풀아, 남의 땅이라고 풀풀 거리지 말고 풀풀 자라기 바란다.

 

 

한낮에는 은빛이다가 황혼녘에는 금빛이  되는 것,
지천인데도 바람 하나를 당하지 못하고 눕지만,
--같이 덤비면 될 것 같은데, 모양만 보면 스크럼 짠 것 같던데...--
아주 쓰러지지는 않고 다시 일어나더라. 

 

‘으악새’가 억새가 아니라는 것은 판정이 난 모양이다. 
그렇지만, 억새는 울지 않던가? 


우는 것도 노래라고 한다면, 그것을 ‘풀잎 단장(斷章)’이라 하겠다. 
“우이잉 워어잉”하는 풀잎의 노래들이 ‘민주주의’이다. 

 

아래는 Walt Whitman의 <Songs of Grass>에 실린 ‘Song of Myself’의 첫 연이다.

 

    I celebrate myself,
    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그런 거지.

 

 

 

그저 그런가 하며 박광진 화백의 ‘항아리’ 그림을 걸어두고 있다. 

‘유채 화’ 시대 이후 ‘갈대’ 연작으로 인기가 있다고. 

(그림에서 앞에서 나부끼는 것은 억새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