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실지락
헤어진 후에
1
(고인이라도 할 말이 아니니까,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예전엔 그랬을 것이다.
어른들이 정해준 고향 처녀와 ‘성’도 모르는 때에 혼인가약을 맺고,
그 후에 ‘사랑’이 발생하지 않으면 같이 살아도 ‘남’이겠지.
유학으로 대처에 나와 신여성을 만난다든가 하면,
‘정실’이긴 하나 ‘그 여자’로 남은 이가 어디 마음에 있겠는가.
이미 문명(文名)을 얻은 이라면 문학소녀도 꾀일 것이고.
그래서 그--고운 시들을 남긴 고상한 시인--는 아름답고 똑똑한 여인을 만나 살게 되었고,
‘고향집 여자’는 일차 탈환을 위하여 반격을 시도하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의 몫이어야 할 미안함과 불쌍함도 얻지 못한 채
추한 모습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만난 분과는 한세상 꿈같이 보내셨다고.
2
지난 해(11월 29일)에 82세로 별세한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 시인.
몇 해 먼저 간 아내를 그렇게 그리워하며 사셨다고 한다.
너는 죽지 않는다.
너는 살아 있다.
죽어서도 너는
시인의 아내.
너는 죽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너는
그의 시 속에 있다.
시인의 아내가 시를 몰라도 된다.
‘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의 시’가 제일인 줄로 알면 좋다.
모르면 비평도 안 할 것이고,
“지적 받기 싫어하는 줄 알지만, 한마디해야 되겠어요.”라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시 속에 있게 된다.
3
한 달쯤 먼저(10월 31일) 가신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 님은
닷새 앞서 떠난 부인을 놓칠세라 따라가셨다.
15년 동안 누워지내는 시인을 수발하는 아내에게 미안해서
“내가 먼저 가야 할낀데...”라고 그러면,
“그건 하늘이 하는 일이지요.”라고 반문하던 김정자 님이 가시자,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 왜 하느님은 느그 엄마 기원만 들어주고
내 기원은 안 들어주는 건가” 하다가
식음을 전폐하는 방법을 택했고,
산소를 둘러보고 돌아오신 후에 그대로 가셨다.
금슬상화
금슬상화(琴瑟相和), 금슬지락(琴瑟之樂)이라는 말을 쓰는데,
거문고와 비파는 늘 맞아떨어지는 악기인가?
악기가 아니고
마음이 맞는 주자(奏者)들이 조화로운 가락을 이룰 것이다.
백낙천은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두고 그렇게 노래했지.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비익조는 날개가 하나씩인 새 두 마리가 합하여야 두 날개를 갖추어 날게 된다는 새이고,
연리지는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 하나로 되었다는 나무이다.
그런데, 그것을 황제와 경국지색(傾國之色) 혹은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비극적--부도덕, 운명, 등, 등을 포함해서--인 사랑이라기보다
고수(高手)들이 용케 만나 이룬 명연주로 봐줄 수 있겠는지.
소리도 궁짝이 맞아야 한다는데...
Simon & Garfunkel
엉뚱하게 Simon & Garfunkel로 생각의 화살이 날아가게 되었다.
Paul과 Arthur는 1941년 생 동갑내기로 뉴욕의 Forest Hill에서 같이 자라면서
한 학교에서 만나 Duo를 이루었다.
50년대(고등학생 때)에 이미 Tom & Jerry로 이름을 날렸고,
60년대에는 Pop--적어도 folk 계열--의 패왕이었다.
환상의 콤비 같지만,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름다운 화음을 남기기는 했는데... 이상하다?
그게 그렇다.
Simon은 작품을 많이 남기지 않는 작곡가로서
그렇고 그런 음악을 만드는데 스스로 질려버렸고,
Garfunkel은 소리는 잘 내지만 작곡의 재주는 없었던지라
Simon의 눈치만 봐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건 ‘형편’이었고, “Like a bridge~”로는 넘을 수 없는 ‘성격’의 차이가 있었겠지.
후에 더러 재결합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미안한 얘기지만) ‘돈’ 때문이었을 것이고.
갑자기 그들이 생각난 이유라도?
몇 달 전에 방영된 ‘Kristy Yamaguchi Special’을 녹화한 것이 있는데,
이름표를 붙여 놓지 않아서 어쩌다가 틀게 되었다.
야마구치가 가펑클의 노래(“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에 맞추어 춤추는(figure skating) 것을 본다.
1992년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야마구치(33살)가 아직도 우아한 동작을 펼칠 수 있었던 것과 상대적으로,
63세의 가펑클은 그 카운터테너의 아름다운 고음처리는 어디로 갔는지 짧은 숨으로 헉헉거리고 있었다.
이제 ‘노래’야 뭐, 그래도 ‘향수’ 때문에라도
팬들은 Paul과 Art가 다시 한번 ‘함께 서기를’ 원할는지?
그들의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묶여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같이 사는 동안 하나이듯 살면 좋겠지.
둘이 어우러져 곱게.
헤어지는 이들이 드는 이유: ‘넘어설 수 없는 성격 차이’.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다르다(different)고 그른(wrong) 것은 아니니까,
다른 줄 알면서 사는 것 아닌가?
‘절음’(빼어날... 絶音)을, 그것도, 둘이 같이 만들지 못한다고
속 터질 것이면,
진즉 절현(絶絃)하는 게 낫다.
노래인 줄 알면 됐고,
“어, 거 소리 한 번 잘하네.” 정도이면 우수작.
우린 ‘솔로(solo)’ 체질이긴 하지만...
이인삼각(二人三脚)의 한심한 꼴을 보며,
서로 웃어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