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무엇이기에

어거스틴은 ‘uti’와 ‘frui’라는 말로 사랑의 종류를 나누었다. 
우티는 ‘이용(use)’으로 옮기기엔 좀 그렇지만,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예컨대, 돈을 좋아하는 것은 돈의 냄새, 질감, 모양을 사랑한다기보다
돈을 사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후루이는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즐김(享受)‘으로 옮길 수도 있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고, 베풀어주시고, 보호하셔서라기보다
하나님이 하나님인고로 그냥 사랑하게 됨을 뜻한다. 
소요리문답은 제1문에서 이를 명백하게 밝혔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교회는 별로 보지 못했다.)  

 

하나님을 즐기고 세상을 사용하는 것이 사랑(caritas, charity)의 질서이다. 
만일 세상을 즐기거나 하나님을 이용하는 뜻으로 좋아하면,
그것은 전도된 사랑(cupiditas, cupidity)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도 질서 있는 사랑이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는 말씀도
그런 관점에서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이 옥사로 끝난 마지막 투옥 전에 사모님께 물었다. 
(그 날 설교할 때 회중석에 끼어있던 ‘짭새’(형사)가 메모하는 것을 보았기에
틀림없이 소환될 것임을 알았다.) 
그렇게 감옥에 드나들기를 제 집 같이 한다는 게 미안해서 아내에게 물었던 게지. 
“당신은 나를 (그래도) 사랑하오?”
사모님은 결연한 대답으로 용기를 드렸다. 
“내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 가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안방에서조차 ‘장난’이 아니네... 그게 질서.)

 

 

가만있자, “사자가 얼룩말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얼룩말을 즐긴다는 뜻이겠는데,
사자의 그러한 ‘사랑’은 선택된 얼룩말이 제 명에 죽지 못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