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릴 사람 잇다 삶고샤셔
달보고 비는 마음
한국처럼 이동 전화가 잘 터지는 나라가 없다. 미국은 주요 간선도로에서가 아니라면, 도시 중간 지점쯤에서 먹통인지 불통인지로 곤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한국은 좀 떨어졌다 싶은 시골에 가더라도 산꼭대기마다 각 이동통신사들의 중계 탑이 세워져 있어서 연결에 어려움이 없는 것 같다. 그런 보기 싫은 탑들도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각 회사들 전용 혹은 공동 소유의 위성을 이용하여 중계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해외 전화는 그렇게 해왔는데, 위성 사용의 비용이 만만치 않아 소비자의 부담이 컸던 것뿐이지만.
(일없이 얘기가 늘어졌다.)
옛사람들에게도 ‘위성 중계’의 개념이 있었다.
‘인공’ 위성이 개발되기 전까지 ‘달’은 확실한 중개 매체의 신분을 유지했다.
그런데, 달은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사용료를 낼 필요는 없었다.
단, 지극정성과 간절한 염원으로 달을 감동시키지 않고서는
수요자의 원망(願望) 성취를 달이 제 임무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테이니,
‘돈 몇 푼’으로 해결되는 것이 차라리 쉬었겠네.
달은 떨어져있는 사람들 혹은 어떤 정이나 뜻을 지닌 존재 사이를 연결하는 매체이었다.
떨어졌다면 얼마나? 피안에서 차안까지의 거리라면, 그것을 수치로 말할 수 있겠는지?
‘원왕생가(願往生歌)’에서 화자(기원하는 사람, 시적 자아)는 달에게 부탁한다.
“이제 서방정토로 가시어든 아미타불께 일러주소서.”
그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달님이 꼭 전달해주셔야 되겠다는 떼씀이다.
그 달은 꼭 이미 공중에 달려있는 천체라기보다는
기원하는 이가 쏘아 올린 공이 아니었겠는지.
미당이 ‘동천(冬天)’에서 일렀듯이.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정읍사
장에 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낙의 마음이라.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가 들리면,
동산 뒤에 숨은 달이 ‘깨꼬~’하기도 전에 천년을 달려가게 된다.
“즌데를 드대욜세라”와 “내 가는대 졈그랄셰라”는 대번에 알겠다.
야행침해(夜行侵害)와 이수지오(泥水之汚)를 꺼리는 것이야
외출중인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도 그렇겠고,
유학풍(儒學風)의 신사라면 자신의 몸가림을 위해서라도 그럴 것이다.
저물면 나가지 말아야지.
진창 근처도 피해야 되겠고.
그런데, “어느이다 노코시라”라는 구절은 잘 모르겠네.
보통, “아무 데서나 짐짝 부려놓고 편히 쉬십시오”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그건 너무 재미없는 얘기.
글쎄, 부녀자의 마음인데...
정인(情人)을 따로 두던 시절이 아니었을 테니,
행상 나들이 다니는 남편말고는 없는 여자인데,
“그 사람이 혹시...”라는 뜻이 아닐까.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라는.
약간의 의심을 “설마...”로 지우며,
“제 생각 하고 있나요? 아니면, 딴 사람과 함께... 에이, 아무렴 그럴까?”로 볼 수 있겠는지?
백제 여자라고 지금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는.
(국문학자의 연구 결과라야 하겠는데, 정보라고는 40여년 전 입시 준비 때 주입된 것뿐,
순전히 어거지 추측이다.)
그런데, 나도 달 보게 되네.
별 뜻도 없는(모르는) 구절만 하염없이 되뇐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