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천 수석 (酌川 漱石)

 

나는 그를 잡지 못했다.
아니 찾지 않는다.
같이 있기가 죄송하고 불편해서.

 

‘다 제 할 나름’이라고 하지만,
같은 자본 가지고 같은 조건에서
장사하는 건 아니니까.
(하늘대고 주먹질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아래 글은
그가 베틀을 걸고 뽑은 첫 조각이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고,
그래서는 아니지만,
계속할 여건이 되지 않아서
닫아버린 블로그의 첫 글이었다.

 


 

작천정(酌川亭) 1

 

부로산을 감돌아 흐르는 작괘천(酌掛川)의 홍류계곡(虹流溪谷)에 있는 작천정에 가면
작천정(酌川亭)이라는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의 현판과

그 곁에는 좀 작으면서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수석정(漱石亭)이라고 새겨진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하나의 정자에 이름은 둘이다.

 

수석정의 ‘수석’이라는 이름은 약 1700년전에 진(晉)나라의 풍익 태수(馮翊太守)를 지낸

손초(孫楚)가 “돌을 베개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枕流漱石)”고

해야 할 것을, 반대로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漱石枕流)”고

착각을 해서인지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손초의 말을 들은  사람이 틀린 것을 지적하자,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옛날 은사(隱士)인 허유(許由)와 같이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 입니다.”고

응답을 했다는 유명한 고사가 생각난다.

영천세이(潁川洗耳)를 들먹이지 않아도, 수석침류하든 침류수석하든 그게 그것이 아닌가,
기산지절(箕山之節)이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데,
귀를 씻고 산 속으로 들어가든 발을 씻고 가든, 술잔을 들고 가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요순시대(堯舜時代)에 살았던 선비인 허유(許由)와 소부(巢父)가 부러운 것은
절개와 학덕이 높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고생을 별로 겪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고되고 싫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것도 괴롭지만 더 괴로운 것은 체면유지가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체면유지를 하지 않아도 되었던 허유와 소부,
가난보다 더 무서운 체면유지를 벗어났으니!!!

나이가 들면서 청빈인지 궁핍인지 구분이 안되고,
가난은 부끄럽지는 않다고 해도 결코 자랑할 것이 아니고,
언제부터인지 아부(阿附)는 친절과 비슷한 말로 들리고
강직함은 불친절한 거만함으로 보이는 것이 슬퍼진다.

 


‘酌 川 漱 石’이라는 네 글자는 생각할수록 멋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도련님>이라는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고 천엔 짜리 지폐에 초상화로 모셔진

일본의 국민적 소설가 나쓰메 소세끼(夏目漱石)의 본명은 긴노스케(金之助)인데

수석(漱石, 소세끼)이라는 필명으로 썼다.

 

 

작천이라는 이름은 홍류(虹流)계곡의 반석이

술잔을 매달아 놓듯 군데군데 패여서 물이 고이는 모습과

호박소와 그 밖의 호소의 모양이 술잔을 닮았으며

물이 호소를 넘쳐흐르는 것이 마치 술을 따르는 것 처럼 보여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수석이라는 것은 양치질을 한 돌 처럼 희고 깨끗한 돌이라는 것이다.

홍류계곡의 반석은 빛깔이 하얗고 광택이 나는 한 개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설악산, 지리산 어느 계곡에 가더라도 단 하나의 반석으로 이루어진 계곡은 볼 수 없으며,
그  빛깔이 이토록 희고 깨끗한 곳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냇가의 빨랫돌을 보면 하얗고 광택이 난다.
아마 수석이라는 말은 냇가의 빨래터에 놓여있는 빨랫돌이라 여겨진다.

작괘천의 반석도 빨래를 하는 돌의 깨끗한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작천의 물(川)은 흐르는 것이며,
수석의 돌(石)은 머무는 것이다.

이것은 흐름과 멈춤의 만남이며
만남과 헤어짐이 느껴진다.

 

잔(酌)은 술잔 작이며, 술 따를 작이다.
잔은 채워야하는 빈 공간을 가진 것이며,

수(漱)는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다.

 

옛글의 “仁者樂山 智者樂水”를
‘酌’과 ‘漱’ 그리고  ‘川’과 ‘石’의 절묘한 조화로 엮어낸 
시골 선비들의 예술적 감각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술잔을 들고 술을 따르는 것은 멋과 흥취는 있겠지만,
타락의 기로에 선 불행한 여인이 연상되기도 한다.

 

빨랫돌은 타인의 더러움을 종일 뒤집어쓰면서 남의 옷에 묻은 더러움에 온종일 시달린다.

그렇지만 빨랫돌은 어느 돌 보다 하얗고 깨끗하며 햇빛이 비치면 반짝이기도 하다.

남의 더러움을 씻어주다 보면 오히려 자신이 더욱 깨끗해지는 것이 빨랫돌(漱石)이다.

 

술을 따르는 작부와 이런 여인의 더러움을 씻어주면서 함께 지내는 수석.

 

사랑은 타인의 아픔을 고쳐주려다 스스로 병이 들어 신음하는 것이다.

지난날 청춘시절에 그리던 사랑의 모습은 작천정과 수석정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의 酌川,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새겨놓은 漱石,
酌川 漱石  이것을 보면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이라 생각된다.

 

진정으로 미움과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미움의 변증법을 알 것인데,

이것 또한 料得少人知 라서...

언젠가 부로산(扶老山)기슭의 홍류계곡으로 놀러 가면
진달래는 붉게 피고 산새는 울고 물은 흐르고 바람은 불어오고,

수석작천정에 앉아,
수작(酬酌)을 걸면서
수작(漱酌)을 즐기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가 그렇게 불렀는데...

 

요즘 세상에 騷人墨客이 있기는 한지
詩會를 연다고 찾아올 이들이 있겠는지
좋은 글 쓰셨으나
물 위에 쓴 글 같아서...
浮游桃花 따라 거슬러 가면
그 때에도 이형 계실지?

 

그래 놓고서는 가보지 못했다.


세상에 많은 게 김씨, 이씨이니,
張三李四를 두고 ‘金李之交’라 하여도 그저 그런 것이다.
그래, 있는 듯 없는 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