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평?

 

한국인이라고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다가 ‘조블’--이런 약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에 끼여들고서
보고 듣는 게 음악회, 연극, 전시회, 영화, 다녀온 얘기들이고 보니,
나는 그동안 ‘야만의 땅’에서 살았는가 싶다.
부러운 정도를 지나쳐 열등감과 자기모멸 같은 비감에 잠긴다.

(어찌 '문화'가 그런 것들에게만 국한되겠냐만.) 

 

고등학교의 교훈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었다. 
똑똑하니까 학교 대표로 ‘장학 퀴즈’에 나갔을 터인데, 사회자가 교훈을 물어보자
“자문평입니다.”라고 그 학생은 대답했다.  (42년 전 얘기.)
“태정태세문단세...”로 배운 아이, 암기 잘 하여 점수 잘 받은 아이의 수준.

 

누가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겠는가? 
훔볼트 타입의 인문주의자(혹은 인본주의자라고 하자)가 모델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또, 그렇잖은가? 
‘교양’을 독점한 문화귀족이
의외로 제 몫의 ‘자유’를 늘리려다가 ‘평화’를 파괴하기도 한다.

어느 한 면을 갖춘 사람이야 여럿 되겠으나,

한 몸으로 동시에 자유인이면서 문화인이기도 하고 평화인--좀 애매한 말이긴 하다--인 사람이

어디 흔하기야 하겠는가.

 

신영복 선생은 어떻게 공부할 수 있었을까? 
대학원을 나오기까지 ‘전공과목’을 배웠을 것이다. 
형무소(혹은 교도소?  감옥?)에서 고전과 서예를 익혔는지? 
‘글짓기’ 후 간수하기가 쉽지 않아 비상한 머리로 모두 암기했을 것이다. 
아무튼, 억울한 세월 속에서 착실하게 희망을 가꾼 그의 자유혼은 내공이 깊은 양질이다.

 

누가 전우익, 권정생 같은 분들에게 배움이 없는 농투성이라고 하겠는가? 
심산의 약초 같은 이들의 사람됨과 올곧음을 지키려는 노력이 옹고집으로 전달될 수 있겠다. 

그들은 때로 속물들을 꾸짖는데, 그 나무람이 비아냥거림이나 독선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가방끈이 짧다고 하던가, 글방(학교)에서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
열등감 없이 자아를 계발하여 우뚝 서고 큰 가르침을 남기기도 한다.
 
어쩌다 높은 자리에 섰는데도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연고주의와 학벌주의의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돛배”의 신세를 탄식하며,
“껍질들 총집합!”의 출정식을 강행, ‘피박’을 도모하기도 한다. 
링컨 숭배자의 올인?

 

‘현자-통치자(philosopher-king)’의  모델은 2,500년 전에나 통하는 얘기였을까? 

 

자유인/문화인/평화인이 없어서일까? 
없기야 하겠는가 마는, 정치판이나 화류계에는 출현하지 않아서일까. 
기다려진다.  보고 싶다. 


‘바위얼굴’은 자진 출두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