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1)

 

붉음과 노랑 사이

 

빈센트(Vincent Van Gogh)와 그의 삼촌이 마차를 타고 가다가
서산 낙일(西山 落日)을 목격하게 되었다.
우리 다 알잖아, 그때쯤 하늘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어른이 감동이 푹 들어간 어조로 말했다.
“우와, 저 붉은 해 좀 봐라.”
아이가 맹랑한 투로 말을 받았다.
“아닌데요, 노란 해인 걸요.”
‘아니, 얘가... 쩝’ 정도로 끝나도 되었는데,
고 어린놈이 빠득빠득 우기는 바람에 
사람 좋은 아저씨가 아주 언짢게 되었다는 얘기.

 


 

노랑과 노랑 사이

 

고흐가 노란 색을 좋아했다고.
그거 다 아는 얘긴데, 어떤 노란 색?
노랑이라고 다 같은 노랑 아니니까.

 

개나리쯤이라면 샛노랑이라 하고, 
프리지어, 달맞이꽃, 애기똥풀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꽃으로 말하자면 종차(種差)뿐만 아니고 개별 편차(偏差)를 고려해야 하니까...

 

   

 

                                            

 

                                

 

노인네 금가락지는 싯누렁?
글쎄, 그것도 어쩌다가 닦으면 달라지니까.

 

해바라기, 고흐의 해바라기, 그것도 다 같은 색은 아니잖아?

 

 

그러니, 노랑은 노랑!  그렇게 지나가자.

 

산은 산 물은 물, 그랬잖아?
산이라고 다 같은 산 아니고... 그러지 말기.

 

부처님 좋아하신 노랑은 그렇게 지나간다고 치고,
그래도 고흐가 좋아한 건 좀 색다르지 않았을까?
그게... 공중변소 벽, 소변기 따로 없던 시절 말야,
그 ‘누리끼끼’에 뜨물을 끼얹은 것 같은 그 색.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흰 꽃이라고 다 흰 게 아니고,
희다고 다 같은 흰색이 아니고,
흰색은 흰색이지 색이 없는 게 아니고,
투명한 건 색을 말할 수 없고.

 

아, 그 구더기는 반투명에 쌀 빛을 띤...

백자 유약 같은,
그것도 희다.

 

분홍.
그건 이미 섞인 거잖아.

 

분꽃을 예로 들면 얼른 알아차리겠네.

순종 붉음과 순종 흼이 만나서 힘쓰면, 분홍색이 나오더라는.
다음 대에 과연 (RR: Rr: rr = 1: 2: 1)이 될지는 알 바 아니고.

 

흰 꽃도 천 가지, 분홍 꽃도 천 가지이니까,
그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건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면, 우리 그러자.
어찌 보면 흰데, 어찌 보면 분홍이라고.
좀 섞였으면 어떠냐고.

 


 

사랑과 사랑 사이

 

알아?
사랑과 사랑 사이에 수천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게 무슨 S, N처럼 극성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예 순정이니 사연이니 하는 말은 입밖에 내지도 말라고.
글쎄 그런 게 아니라니까.

 

누가 뭐랄 것도 아니고,
해명할 이유도 없고.

 

순도를 따질 것도 아니다.

 

그래도
가꿈에 따라
닦음에 따라
달라지더라는.

 

그래서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 아니더라는,
사랑이 참 여럿이더라는.

 


진실?

 

사실이 아니면 거짓인데,
진실은 제가 진실이라고 그러면
“아냐, 넌 진실 아냐.” 할 수 없거든.

 

그러니까 최진실이 있지.
뿐 만인가, 김진실, 이진실이 돌아다니지.
진실은 쌔고 쌨지.

 

진실 너머에
뭐 하나쯤 더 있어야 되는 것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