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3)

 

어려울 것도 없는, 나란히 누운 이들의 얘기

 

간주곡도 아니고,
힘들어 쉴 것도 아니었는데,
공연히 들국화는 들먹이고?

 

그렇게 툇마루에 앉아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싶은 때가 있으니까.

 

정작 하고 싶은 말?
그런 것 없어.

 

어두워지면 촛불 켜고
초 토막이 짧아지면 자면 되고.

 

잠들기 전에 웅얼거리던 말들,
말한 이도 그런 적이 없다는,
들은 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그래도 그런 말들이 영혼 안에서 떠다니더라고.
몸의 곳곳에 실핏줄로 전달되더라고.

 

 

 

사실이 앞서긴 하지만

 

사실은 실재(實在, reality = what is really real)를 구성하는 벽돌이다.
 
벽돌만으로 집이 되는가?
벽과 천장은 공간을 이룬다.
내장, 그리고 가구를 들임으로써 그것은 살 집이 된다.

 

진실은 사실 위에 세워진다.
사실이 받쳐주지 않는 진실은 허구이다.
진실이 허구?  그건 ‘산송장’보다 더 황당한 말이네.

 

우리 살이 닿는 것은 진실이다.
보통사람들은 사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실험실의 과학자, 수사관이 아니라면.

 

사실 확인이 없기에,
속을 수도 있고
맹신의 사이비종교나 선동 정치가 가능할 것이다.

 

모든 것에 사실 확인이 따른다면?
거기가 지옥이다.
믿음이 조금도 없이는 살 수 없다.
덮어줌이 없이는 너무 흉하고 추운 세상이고 만다.

 

진실은 사실의 차단이 아니라
사실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사실을 의미로 치환하여 전달한다.
 
우리는 채소를 먹는다.
섬유질과 비타민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다.
날것으로 상에 오르던가?
익히지도 않고, 양념이나 소스도 없이?

 


바로잡기?

 

역사란 힘센 자들에 의하여 칼로 새겨진 글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칼로 파야 지울 것이다.

 

바로잡기는 있어야 하지만,
역사 바로잡기? 

그건 점령군이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과도한 축제와 불필요한 분풀이일 뿐이다.

 

미움은 사실 밝히기로 시작하지 않던가?
하긴 진실의 이름으로 사실을 억압한 것이
수구 기득권 층이었으니까.
사실의 날선 검으로 격파하고 나면?
신흥 이권 계급이 진실을 조작할 차례.

 

바로잡기.
있긴 있어야 하는데,
누가 할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아도

 

그리움이란
대상이 있기는 한데 분명치 않은,
“사랑까지야...”로 부정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그런 것이다.
그리움이 사람을 이끌어간다.

 

시?
다 쓰지 않는 거야.
그래서 뭔가 있는 듯이 보이는.
사기가 아니고,
시란 그런 거야.
그래서 좋은 거야.
다 까발려봐라...
피해자 진술서, 아님 실험보고.

 

흐릿하지만 트릿하지 않음.
Fuzziness, 그것처럼 편안한 게 있을까.

 

안개.
걷혀야 하지만, 없어도 안 되는 것.
안개를 불편해하지 않으며 살기. 

 

 

 

사랑은...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  죄송해요.
짧은 글, 산뜻한 그림, 대숲의 바람소리 같은 음악으로 엮어 쨍 햇볕 나야 짱! 블로그.
해도 너무 했네.
그래도 Love story로 끝내겠어요.

 

사랑은
속이지 않지만
까발리지도 않는,
덮어주지만
부패를 껴안지는 않는 것.

 

그러고 보니,
철학하기(philosophieren)란 사랑이었네.
누구라도 하기 쉬운.
정치도 그렇겠네.
바르게 다스림이라면.

 

희미한, 흐릿한, 색 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이’를 정인으로 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가 그러더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전 13: 12).